박사(博士) 하경덕(河敬德)33세손

공의 초휘(初諱)는 태성(泰成)이요 개휘(改諱)는 경덕(敬德)이요 호는 월당(月堂)또는 안당(晏堂)이다 영의정 연(演)의 21대손(孫)이시오 좌랑공 휘 제명(悌明)의 20대 손이시며 진사공 휘 두영(斗永)의 증손이시오 휘 상길(相吉)의 손자시며 휘 경렬(慶烈)의 3남 중 장남이시다 선비(先비)는 경주 김씨 응식의 따님이신데 1897년 6월 26일에 전북 익산군 춘포면(春浦面) 곧 대장촌(大場村)에서 공을 낳으시었다,

근엄한 기질과 천재적 총명을 타고나신 데다 한 학자 이면서 개화 문명의 선구자시며 국문법 학자이신 선공의 엄격한 교육을 받아 진작 능히 가범(家範)을 이어 받고 한학을 일찍 이루시었다. 대개 위인(偉人)에게는 소시(少時)의 기특한 실화가 있는 법이다. 전주(全州) 제 1공립 보통학교 4년제 졸업반 재학 때 교장 모리야마(守山)가「황은(皇恩)」이라는 제목의 작문 시험을 보이었으니 이는 왜왕을 찬양하라는 강요였던 것이다 공이 일필휘지로 쓰시되 단군 성조(檀君聖조)개국의 홍은(鴻恩)으로부터 시작하여 역대 군왕의 치적을 약술한 다음 고종 황제의 실국(失國)의 통한으로 끝맺으셨으니 이는 얼마나 엄청난 일이었겠는가?

1915년에 평양 숭실 고등보통 학교를 졸업하시고 1916년에 대망(大望)을 품고 미국(美國)으로 건너가시어 1925년에 하버드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하시고 1928년에 그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으시었다. 그 대학교 교수로 잠시 계시다가 1929년에 드디어 비단 옷 입고 고국으로 돌아오셨다. 1931년부터 1943년까지 연희 전문학교 문과 과장으로서의 교수가 되시어 영문학 및 사회학을 강의 하셨는데 공이 흥사단(興士團) 단원으로 독립 운동에 가담하셨기로 일제(日帝)의 강제 추방을 당하시고 흥업 구락부(興業俱樂部)사건에 연좌(連坐)하여 옥고(獄苦)를 치르시었다. 아 하늘이 정의를 도우사 을유년에 드디어 조국이 해방되니 어시호(於時乎)공이 귿은 결의로 사회 실천가로 전신(轉身)하여 이묘묵(李卯默)백낙준(白樂濬) 오천석(吳天錫) 김영희(金永羲) 유형기(柳灐基)등 명사들을 참여시키고 사업가 노 인화(盧仁和)의 출연(出捐)을 받아 그 해 9월 5일에 영어 신문사『코리아타임스』사장이되시어 그 뛰어난 문필로 숭고한 애국 정신과 사회 계도(啓導)사상을 유감 없이 발휘하시었다.

1946년엔 오 세창옹(吳世昌翁)의 뒤를 이어『서울 신문사』사장이 되시어 몸소 내용을 검열하시고 손수 사설과 논설을 쓰시었다. 이해에 또 합동 통신사 사장이 되시었다. 또 이해에 종합 잡지「신천지(新天地)」를 창간함으로써 잡지 저널리즘을 일으키어 잡지 언론 역사상의 금자탑을 세우시었다. 1947년에 과도정부 입법의원(立法議院)의원이 되시고 1948년에 인도(印度)뉴우델리에서 열린 범아(汎亞)문화 대회에 한국 대표롤 참석하시었고 조선 축구 협회 회장으로 추대 되시었다. 1949년에 국제 문화관 사장이 되시었는데 불행히 1950년에 병마가 간장을 침노하여 일본으로 가서 치료를 받으셨으나 1951년에 55세를일기로 서거하시어 전북 완주군 상관면(上關面)죽림리(竹林里)진사공 묘소 아래에 잠드시 었다. 어즈버 공께서 55세를 갑절로 사셨더라도 조국과 인류 사회를 생각할 때 아깝다 하겠는데?하느님이 부르심 어찌 그리 급하였던고?

공은 누구신고? 학자요 교육자요 언론인이요 독립운동가라는 것이 학자들의 통념이다. 옳도다 공은 철학자시며 우리 나라 사회학의 원조(元祖)이시다. 아버드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이「소시얼 로오즈(social lows)사회 법칙론」인데 이것이 1930년에 미국에서 출판되었거니와 서울 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임근수(林根洙)는 원간지「신문평론」67호에서 이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이 논문이 미국학계에서 당시는 물론 지금에 이르기까지 고전적(古典的)인 문헌으로 간주(看做)되어 널리 학계에서 인영되고 있다고 하며 일본에서는 동대(東大)에서 30년대에 텍스트로 사용된 사실이 있었다. 후략(後략)』공이 12년간 연희 전문학교에서 수많은 영재들에게 도덕과 민족애를 심어넣어주신 사실은 임교수외 허다 제자들과 생존 친우들이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공께서「코리어타임스」창간호에 쓰신「연합군 환영사」는 당세의 명문인데 임 교수는 앞의 월간지에서「먼후일의한국을 내다보는 듯한 함축적이면서도 간결한 표현의 좋은 문장이다」라고 하였다. 공의「코리어타임스」창간을 주도하신 목적은 국제적 고아(孤兒)가 된 한국의 귁위를 만방에 선양하려 함에 있었다. 서울신문사 사장으로 계실 때 에는 이승만(李承晩)전권의 정실적 내각 조직을 통렬히 비판한 사설쓰셨으니 무관(無冠)의 제왕(帝王)의 춘추필법(春秋筆法)이 공부자(孔夫子)의 그것을 닮았었다. 이를 만하다 공은 교육을 통하여 후진들의 애국심을 고취(鼓吹)하셨을 뿐 아니라독립 운동에 직접 가담하여 분투하셨으니 공위 교행(敎行)일치의 덕망을 여기서도 볼 수 있지 않은가? 공의 사상은 무엇인고 학문을 토대로 한민족애요  인류애이며 사회 개선의 이념(理念)이요 자유평등의 민권(民權)수호 정신이다.

공이 일찍이 남의 간청을 세 번 거절한 일이 있었다, 미국에 계실 때 이 승만 박사가 자기를 도와달라고 한 간청과 과도정부(過渡政府)때 문교부 장관 수락 요청 및 국립 서울대학교 총장 수락요청을 모두 벼슬하기 싫어함과 언론 창달(言論暢達)의욕으로 사절하신 일이 그것이니 이는 부귀영화를 뜬구름으로 돌리고 가장 보람있는 사업으로 국가 사회의 일꾼이 되려는 의(義)로운 행실이었던 것이다. 마나님은 문화 유씨 경현(敬鉉)의 따님이신데 1남을 얻으셨다. 이름은 달인(達仁)이다 공의 친우(親友)엔 상기(上記)명사들 외에 국문학자요 시조(時調)문학 중흥자인 가람 이 병기(李秉岐)박사가 있었다.공의 아우님 태흥(泰興)씨는 영문학자신데 내가 공에 관한 문헌과 가장(家狀)을 얻으려 갔을 때 간곡히 부탁하신 바 는 한마디도 보태지 몰라 함이었다. 아 허다 지성인들의 경앙(敬仰)과 이목(耳目)이 있는데 어찌 과장할 필욘들 있으며 또 그렇게 할순들 있겠는가?

이에 기린다, 해 넘어간 이땅의 어둠을 밝히려고 달(月)처럼 오셨다가 날이 새자 가셨고녀 겨레여 달을 볼 제면 월당공(月堂公)을 기리소 벼슬은 마다 시고 무관제왕(無冠帝王)되시어서 이우남(李雩南)허물도 서슴없이 밝혔으니 진실로 칼보다 센 것 잛는 붓대 아닌가? 가시밭 해치느라 찔리고 넘어지던 온 몸의 붉은 피 청사(靑史)를 적셨으니 죽림리(竹林里)무덤의 높이 방장산(方丈山)과 어떠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