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곡공(尼谷公) 하응로(河應魯)29세손

공의 휘는 응로(應魯)요, 자는 학부요, 호는 이곡(尼谷)이요, 성은 진양 하씨이다. 고려로부터 조선조에 이르면서 대대로 위인들이 계셨는 바, 송헌 진천 부원군 원정공 휘 즙(楫)과 고헌 진산 부원군 휘 윤원(允源)과 목옹 군부상서 휘 자종(自宗)과 대사간 휘 결(潔)과 함길도 관찰사 휘 자청(自淸)과 설창 증 대사헌 휘 철(澈)이 가장 현저하셨다. 대사간은 문효공 휘 연(演)의 아우님이신데, 명덕(名德)이 세상에 드러났고 : 설창(雪窓)은 겸재(謙齋) 휘 홍도(弘度)의 조카님이신데, 그 학문이 받은 바가 있었다. 설창의 아드님 휘는 덕원인데 선전관이요, 선전관의 아드님 휘는 대항(大恒)인데 통덕랑이다. 통덕랑의 아드님 휘는 달성(達聖)이요 호가 국헌(菊軒)인데, 당인(黨人)들이 종천 서원(宗川書院)을 핍박하므로 공이 많은 선비들을 창솔(倡率)하여 향사를 돌이키는 일을 조정에 고(告)하여 흉도(凶徒)들을 쓸어내시니, 아는 사람은 호걸로 칭송하였다. 이분이 공의 고조님이시다. 증조님 휘는 석봉(錫鳳)이요, 조부님 휘는 재원(在源)이요, 황고님 휘는 상호(相灝)이다. 선비 재령 이씨는 천묵(天默)의 따님이시오 모촌(茅村) 정(瀞)의 후예이신데, 부덕을 지니셨고 글을 잘하셨다.

헌종 무신(1848)년 정월 16일에 공이 진주 서쪽 북평에서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이 있어 밤에는 글을 읽고 낮에는 농사일 하여 부모님을 봉양할 음식의 자료에 대비하셨다. 기축(1889)년에 부모상(父母喪)을 당하여 3년 동안을 초목지사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셨고, 건강을 해쳐 거의 멸성(滅性)하셨으므로, 집안 사람들이 몰래 고기 즙을 드셨으나 물리치셨으며, 조상하는 사람이 이르면 눈물 흘리기를 비쏟듯, 하셨다. 묘소가 5리밖에 있었으나 성묘하기를 거르는 날이 없었고 바람 불고 비 오는 날도 폐하지 않으시니, 마을 사람들이 효잣길을 닦아 주었으며, 흰 제비가 여막에 집을 짓고 깃들였다가 복제(服制)가 다하고서야 돌아갔다. 일찍이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귀밑머리가 하얗게 되어 차마 노쇠한 형상을 부모님에게 보일 수 없었으므로, 꾸짖으면서 뽑아 버리니, 다시는 희어지지 않다가 어버이 돌아가신 뒤 며칠 안 되어서 모두 희어졌다.

일찍이 술을 좋아하셨으나 상중으로 인하여 술을 끊고는 종신하도록 술상을 대하지 않으셨다. 선대의 기일(忌日)을 당하면 3일간 소밥을 드시고 재계함을 예법과 같게 하셨다. 아우님들이 일찍 돌아가셨으므로, 조카들 보살피기를 자기 자녀같이 하시어 시집보내고 장가보내는 것을 시기를 잃지 않게 하셨다. 손자 우선(禹善)이 재예가 있으므로, 경계시켜 말씀하시길, 「사람이 덕은 있어도 글을 읽지 않으면 질박하게 되고, 글은 읽지 않으면 질박하게 되고, 글은 읽었어도 덕이 없으면 고루하게 되는 것이니 : 두 가지를 갖춘 뒤에야 세상에 행세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다. 20여 세에 월촌(月村) 하 달홍(河達弘)을 따라 사서(四書)를 읽어 조예가 정심하게 되었고 저술(著述)에 능하니, 월촌이 탄상(嘆賞)하여 말하길, 「하씨를 크게 높일 사람은 필연코 이 사람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과거 공부에 힘을 써서 명성을 날리었는데, 얼마 안 되어 포기하고 이르시되, 「자신을 위하는 학문이 아니다」하시고 인하여 정주(程朱)의 학문에 힘을 다하셨다. 또, 가문의 가학(家學)을 자신의 걱정거리로 삼으셨다. 일찍이 말씀하시되, 「경(競)은 마음 속에서 세워지는 것이므로 마음이 곧아지고, 의(義)는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밖이 방정(方正)하게 되는 것이니, 마음이 곧고 밖이 방정한 경지는 모름지기 극기(克己)하는 데서 마땅히 보고 취해야 할 일이다」라고 하셨다.

공이 젊어서부터 유림에 명망이 있어, 반드시 유학의 큰일에는 공을 논변(論辨)의 으뜸으로 삼았으므로, 이 때문에 청곡(靑谷), 우방(牛芳), 뇌룡(雷龍)에서 남명(南冥)의 문집을 발간할 때도 공이 실로 의논의 주장이 되셨다. 옥산(玉山), 이의(二宜), 여택(麗澤) 등 여러 당(堂)의 당장(堂長)과 그 부(副)를 맡아 흥기(興起)시키고 쇄신하신 공이 적지 않았다. 늘 겸재(謙齋) 선생의 유문(遺文)의 정리가 정밀하지 못했음을 한스러이 여겨 면우 곽 종석(郭鍾錫)과 의논하여 틀린 곳을 바로잡으셨다. 또, 모한재(慕漢齋)의 계사(契事)를 가다듬기를 꾀하여, 재물이 점점 불어나자, 문서를 인쇄하기 시작하여 거의 완성되려는 때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어, 철폐하고 돌아오셨다. 공은 기억력이 뛰어나 비록 어려운 구절일지라도 한번 눈이 지나가면 곧 외시었고, 어릴 때 한 번 본 사람도 돌아가실 나이에 이르시도록 모두 기억하셨다.

갑오(1894)년에 동학난이 일어나 군읍(郡邑)이 소란하게 흩어졌으나 공이 사신 곳은 홀로 평온하였으므로,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가 그 곳에 손자들을 데리고 가서 여러 날을 강학(講學)하고 돌아갔다. 일찍이 월산(月山) 조 성주(趙性宙)와 월주(月洲) 하 조헌으로 더불어 향약(鄕約)을 만들어 방인(方人)들을 면려하셨다. 또, 하 봉수(河鳳壽)로 더불어 향음례(鄕飮禮)를 종천 서원(宗川書院)에서 행하셨는데, 그 일이 끝나자 방약(坊約)을 정하여 행하게 하셨다. 이것은 대개 여씨(呂氏)의 법제를 따른 것이어서 환난(患難)을 구휼함이 선무(先務)였기로, 드디어 차례로 각 이(里)에 행하여지게 되었다. 이(里)에서 각기 비용을 부담하여 모임이 있게 되면 규약을 읽어서 보고 듣는 마음을 용솟음치게 하니, 이웃 방(坊)에서도 그 일을 사모하여 감화하게 되었다. 나라가 또 크게 소란하게 되자, 의병이라고 이름하던 것들이 실은 강한 도적들이었는데, 무리를 지은 도적 수십 명이 무기로 마을 사람들을 위협하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 흩어지므로, 공이 외방으로부터 돌아오시다가 의리로써 효유(曉諭)하시니, 도적들이 감동하여 물러갔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해산물을 갖다주는데 즉시에 물리쳐 받지 않으시므로, 옆에서 그 연유를 물으니, 이르시되, 「그가 취한 것이 모두 불의(不義)의 한 데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경술년 합방 이후로는 마을의 동지들로 더불어 모한재(慕寒齋)에 높이 누워 서로 시를 잂어 울분을 달래셨고, 또 방호산(方壺山)과 금산(錦山)을 유람하여 기행문을 쓰셨다. 중세(中歲)에 사림산 아래 심방동(尋芳洞)에 터를 잡고 이곡정사를 지으셨다. 심방동의 일명이 이방(尼坊)이 었다. 함께 기거하던 모든 생도와 손자들을 각각 재성(才性)에 맞게 이끌어 선도하였다. 자제들에게 명(命)하시어 선대의 재실을 중수하게 하셨고, 또 선대 묘소의 석물을 갖추게 하시되 모두 완벽하고 정밀하게 하도록 하시어 오래 전할 계책으로 삼으셨다. 족보를 광범하게 수보하려 하시다가 이에 파보(派譜)를 만들어 이르시되, 「소목(昭穆)을 문란하게 하지 않으면 족(足)하다」고 하셨다.

병진(1916)년 12월 15일 정침에서 돌아가셨다. 임종에 이르러 자손들에게 말씀하시길, 「내 명(命)이 저 창호지의 간격과 같으니, 자리를 바르게 하라」하시고 조금 후에 돌아가셨으니, 군자들이 바른 운명(殞命)이었다고 하였다. 임시로 모원에 장사하였다. 배위는 문화 유씨인데, 춘영(春永)의 따님이시오 찬성 자미(自湄)의 후예이시다. 4남, 2녀를 두셨으니 : 아드님은 재도(載圖)요, 재청(載淸)이요, 출계한 재형(載泂)이요, 재현(載玄)이며, 사위님은 이 운화(李雲華), 이 정하(李貞夏)이다. 손자님은 우선(禹善), 겸선(謙善), 원선(元善), 구선(九善)이요, 증손은 태구(泰九)이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나를 찾아 비명(碑銘)을 청한 사람은 우선(禹善)인데, 그 사람이 학문이 높아 행장을 쓰는 데 터럭만큼이라도 사실과 같지 않을까 두려워하니, 가히 비명을 쓸 만하다. 이에 명(銘)한다.

경재(競齋)선생과 겸재(謙齋)선생에게 아우님과 조카님이 계셨으니

대사간(大司諫)과 대사헌(大司憲)의 높고높은 명망과 실상이었네.

전대의 빛으로 배태(胚胎)되셨으니, 품성은 아름다운 기질이셨네.

효성 있어 감응(感應) 있었으니, 그와 짝 될 사람 드물었네.

흰 귀밑머리 어루만져 못 나게 하셨고, 흰 제비 와서 깃들였네,

평생의 업(業) 삼은 데는 바등 바가 있어, 가문의 학문을 치밀하게 하셨네.

위로 남명(南冥)까지 거슬러 경의(敬義)의 학문을 이으셨네.

이의(二宜). 여택(麗澤)당에 노니실 제 예의에 질서 있었네.

나라의 망함을 통탄하여 모한재에 은거하셨고 나가서는 회포를 펴셨으니,

방장산이 비할바 아니었네. 이방(尼坊)에 지은 집 있어 공부하셨네.

스승과 생도와 손자들이 글로 더불어 일치하였네.

공의 행적 고을에 가득하거니, 어찌 이 돌에 다 쓸 수 있으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