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남공 휘(諱) 백원(百源)선조님의 묘소 : 광주시 동구 월남동 산77번지

하백원(百源) 27세손

조선말기 최후의 실학자(實學者)인 선생의 휘는 백원(百源)이요, 자(字)는 치행(稚行)이며 (號) 규남 이다. 사직공(司直公) 27세손(世孫)이며 대사간공 휘 결(潔) 할아버지의 15세손(世孫)이다. 선생은 정조(精祖) 5년(1781) 1월 11일에 복천(福川)의 야사촌(野沙村:지금의 전남 화순군)에서 하진성(河鎭星)과 장흥고씨(長興高氏)사이의 2남중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선생은 타고난 재질이 수미(粹美)하고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기상이 늠름 하였으며 일찍이 글을 읽기 시작하여 6세때에 벌써 들앞의 봉선화를두고 '유조수(有照水) 하니 수욕취지(水欲醉之), 곧 봉선화가 물에 비치니 물이 취코자한다'는 시를 읊어 집안 어른들과 이웃의 선배 장로(長老)들 을 놀라게 하였다. 그 후 학구에 대한 정열이 대단하였으며 이 무렵 송사 정재면(松沙 鄭在勉)은 선생을 한번 보고서 창차 위대한 큰 그릇이 될 것이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선생의 학업은 일취월장하여 12,13세 때에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다 읽었으며 시문에 능통하여 늘 이웃 사람들 의 경탄을 받았고 15,16세에 이르러서는 문사(文詞)로써 선생을 앞설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선생은 율곡(栗谷),우암(尤庵),학통(學統)을 계승한 성담 송환기(性潭 宋煥箕)의 문하(門下)에 가서 수학하였다. 성담은 늘 선생을 세상에서 드물게 보는 영재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성담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한지 2,3년 후인 23세때인 순조3년(1803)에 주변 측근들이 강권의 의해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27세 때에는 성담 송환기(性潭 宋煥箕) 의 스승인 운평송능상(雲坪宋能相)이 무고를 당하여 삭일(削逸)의 화를 입게되었다 이때 선생께서는 대변문자(對辯文字)루천언(屢千言)을 지어 사우간(士友間)에 널리 알리어 조정 대신들이 헌의(獻議)하여, 운평(雲坪)은 부일(復逸)의 은전(恩典)을 입게 되었는데 이는 선생의 명철한 별설에 힘입은 것이었다고  한다.

선생의 학문은 수학가정이나 학문내용을 살펴보면 율곡(栗谷),우암(尤庵),학통(學統)을 계승한 성담 송환기(性潭 宋煥箕)의 문하(門下)에서 주자학(朱子學)을 배워 성리학적(性理學的), 의리지학(義理之學)의 학문 정신을 삼았고, 7대조인 금사 하윤구(錦沙 河潤九)로 부터 증조(曾祖) 병암 하영청(屛巖 河永淸)에 걸쳐 형성된 가학(家學)을 계성하였으며 여러 대 를 이어온 학문적 배경은 영 정(英 正)시대의 실학사상(實學思想)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우선 선생의 학문적 성격은 이해 함에 있어서 실학사상(實學思想)에 관한 부분을 빼놓을 수 없다,  왜냐 하면 선생의 학문적 저술은 성리학적(性理學的),의리지학(義理之學)에만 거치는  것이 아니라 천문(天文),지리(地理),율력(律曆),산수(算藪),방적(紡績),후종(侯鍾) 자승차(自升車), 서화(書畵),도장(圖章), 자명종(自鳴鍾),계영배(戒盈盃),와륜(臥輪)등 을 연구 제작하였고 심지어 고려에 까지 연구의 손길을 뻗치는 등 제작분야 를 백과전서적(百科全書的)으로 광범위하게 망라하고 있을뿐 아니라 특히 자승차(自升車)의 발명 동국지도 (東國地圖)의 제작등은 실용적이고 실증적(實證的)인 실학의 연구에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30세 때(1810년)에는 물의 역학을 과학의 원리로 이용하여 자승차(自升車:양수기)를 발명하였으며 31세 때(1811년)에는 우리 나라 지도인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제자하였는데 한장은 우리 나라 전도(全圖)이고 8장은 8道의 지도를 따로따로 그린것이다.이 지도는 백리척(百里尺)의 축척법(縮尺法)과 같은 새로운 지도 제작법을 활용한 것으로 지세(地勢), 지형(地形) 산하(山河)와 교통로(交通路)등의 정확한 표시 등이 오늘 날의 지도와 거의 같을 만큼 자세하게 그려져있다. 우리 나라 지도 제작의 역사를 살펴보면 농포자,정상기(農圃子,鄭尙驥)가 그린 동국지도가 효시이긴 하지만 선생의 동국지도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與地圖)보다 51년이나 앞선 것으로서 지도 제작상의 기술의 수준이 탁월했음을 엿볼 수있다.

선생은 사환기(使宦期)중 사법부(司法府)의 중직인 형조좌랑(刑曺左郞) 임직(任職)시에는 사리를 따져 물음이 자세하고 밝았으며,송옥(訟獄)을 처리함이 공평하였고, 그 대화의 지능이 뛰어남에 관(官)들을 감탄케 하였으며, 판결의 어려움이 있으면 선생에게 항상 물어서 처리하였다고   한다.석성현감(石城縣監)으로 지방관을 지낼 때에도 공평무사 하게 법을 진행하고 이서(吏胥)들의 농민 수탈 등을 막음으로서 관(官) 기강을 바로 세우고 안민위주(安民爲主)의 행정력을 발위하였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전라감사(全羅監司)인 서유규 에게 스스로 발명한 자승차(自升車)를 수리(水利)와 농정(農政)에 활용하도록 건의함으로서 한해(旱害)에 시달리는 농민의 고통을 덜고, 나아가 농정개혁의 혁신을 일으키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선생은 조선말기 순조(純祖)때의 실학자(實學者)로서 여암,신경준(旅庵,申景濬)존재,위백규(存在,魏伯珪)신재,황윤석(신齋,黃胤錫)과 함께 호남실학(湖南實學)사대가(四大家)중 으뜸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선생의 학문적 사상은 명분위주의 성리학적(性理學的)인 것과 실질 위주의 실학적(實學的)인것을 포괄하고 성리학과 실학의 양면성을 오래도록 지낼수 있는 생명력 있는산 학문으로 높이 평가 받고 있어 근자 성균관(成均館)에서 선정한 우리나라 백대유학(百大儒學) 중에 한분이시다. 선생은 훌륭한 학자이셨고 의지신 목민관(牧民官)이었으며, 위대한 과학자(科學者)이셨다. 우리는 이러한 선생에 얼을 오늘에 되살려 보다 슬기롭고 창의력있는 지행일치(知行一致)의 덕행(德行)을 본받는 후손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무등산의 실학자 규남 하백원(河百源.1781-1844)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에서 태어난 하백원 은 무등산 절경중 하나인 규봉의 남쪽마을 에서 출생했다하여 호를 규남 이라 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실학을 연구할 수 있는 가정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7대조 할아버지 하윤구는 북경에서 자명종, 천리경, 만국전도 등을 얻어온 정두원과 친교가 두터웠고, 그의 할아버지 하영청은 신경준, 홍대용 등의 실학자들과 교유가 깊었다. 그는 뛰어난 창의력으로 이땅에 과학문명의 꽃을 피워낸 과학자요 성리학자이며 실학자였다.

20세 남짓까지 규남은 충남에 있는 송환기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이들의 학문을 이어받았던 하백원은 성리학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천문, 지리, 산수, 자승거, 서화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승거를 새로이 발명하고 자명종을 개량하여 제작하였다. 자승거는 일종의 양수기로서 당시의 과학 기술로 보아 매우 선진적인 수준이었다. 자명종은 홍대용 등이 제작한 것인데 미비점을 보완하여 실용 단계까지 도달한 과학적 발명품이었다. 그리고 방적기를 제작하고 고려 청자를 연구하기도 하였다. 그는 기하학 지식을 토대로 축척 도법을 사용한 새로운 지도 제작법을 이용하여 동국지도 9폭을 제작하였다. 1폭은 우리 나라 전도였고, 나머지 8폭은 8도를 각각 나누어 그린 지도였다. 이 지도는 백리를 일척으로 축소한 새로운 축척법을 활용한 것으로 지형, 지세, 산하, 교통로 등이 오늘날의 지도처럼 매우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러한 발명품과 제작품들은 과학적 사고 방식에 입각한 창의적인 실학 활동을 반영한 성과물들이었다. 진사시에 합격한 23세부터 53세까지 학문에 전념했는데 이 30여년간이 본격적인 실학 연구에 몸을 바친 시기이다. 그가 만든 대표작은 시간이 되면 스스로 소리를 내던 자명종 , 특이한 술잔인 계영배 , 펌프같이 물의 수압을 이용한 강흡 기 , 짐을 나르던 나무소 , 타이머 같이 조정하던 화취와 약탕로 , 소변통을 밭까지 실어 나르던 거북이 , 한곳에 불을 때면 여러방이 따뜻하고 연기가 나지않는 개량아궁이, 청기와, 유리, 벽돌 등의 제조, 대동여지도 보다 51년 앞선 동국지도 , 세계지도, 천문도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7책3권이 있다. 51세때 참봉이 되어 처음 벼슬길에 나갔고 53세때 금부도사로 전임되었으며 2년뒤에 형조좌랑, 61세에 석성현감에 부임했으나 지방 토호들의 모함으로 충청도 보령현으로 유배되었다. 1843년 특사로 풀려나 항리로 돌아온뒤 이듬해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