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공(錦南公) 하상조(尙朝)27세손

소동파(蔬東坡)가 이르기를 「재주가 많으면 복록이 엷다」고 하였거니와 슬프다, 금남공(錦南公)은 우리 아버님과 한 젖을 잡수신 분이신 바, 문장의 넓은 지식 및 높은 덕망과 떳떳한 행실이 가히 조정의 중임을 맡을 만하였으나 운수가 기박하여 끝내 포의(布衣)로 평생을 마치셨으니 어찌 끝 없는 아픔이 아니겠는가? 공의 휘는 상조(尙朝)요, 자는 중유요, 호는 금남(錦南)인데, 1823년 4월 22일에 돈평에서 출생하셨다. 탁월한 재주와 효우의 성품은 하늘이 주신 것이라, 겨우 말을 배우면서 글자를 아시고,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날마다 수백 어(語)를 외우니, 고을에서 보는 사람마다 재주를 중히 여겼다.

아홉 살 때 조모님 장씨(長氏)가 별세하였을 때 공이 우리 아버님과 함께 조상을 받는 절차를 어른과 같이 하였고, 열 두세 살 때 능히 글을 지으셨다. 조부 천산공(天山公)이 성품이 엄격하고 자질(子姪)교육에 법도가 있으시어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중하게 매질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셨다. 부군 형제에게 명하여 상대 산재(上岱山齋)에서 글을 읽게 하니, 열심히 읽어 침식을 잊었고, 사자 육경(四子六經)과 백가지설(百家之說)을 모두 관통하여 원근(遠近)의 나이 많은 스승과 학식과 덕방이 높은 선비들이 다 이르기를 하씨 문중 두 아이는 이 세상의 보배라고 하였다.

재종숙 후로 양자가서 양모(養母) 정씨(鄭氏)에게 효도하였다. 이 때에 세상이 다 공령(功令)을 위해서 과거를 보았는데, 공은 백형 금포(錦圃)공과 더불어 문장과 필법에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외삼촌 승지(承旨) 장석준(張錫俊)이 항상 말씀하기를 「생질 두 아이는 학문은 도룡(屠龍)을 섭렵하였고, 재품이 민첩하여 다음에 급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격문(檄文)을 지어 진임(陣琳), 원굉(袁宏)같은 솜씨를 나타낼 것인데, 우리는 늙어서 보지 못할 것이다」하셨다. 25세에 조부님 천산공이 별세하시매 애통심을 절차 넘게 하였고, 초상(初喪)에서 연제(練祭)까지를 옛 예법대로 행하셨다.복(服)이 다한 뒤에 공이 과거를 보러 서울에 가려 할 때 아버님이 이르시기를 「우리 선조 경재(敬齋). 연당(蓮塘). 학암(鶴巖) 3세 묘소가 인천 소래산에 계신 바, 위토와 환송을 산하에 사는 하 참봉 원홍(元泓)이 다 팔아먹었다 하니 통분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 그대의 이번 결음에 과거의 되고 안 됨은 운수이니 어찌할 수 없는 일이거니와, 만약 위선하는 정성이 없으면 어찌 자손 된 자의 도리라 하겠는가? 돌아오는 길에 곧 소래산에 가서 팔아먹은 위토를 찾아 놓고 집으로 돌아오면 선대를 위하는 정성 옅지 않음이 될 것이라」하시니, 공이 삼가 분부대로 할 것을 다짐하고 곧 서울에 가서 과거에는 오르지 못하였으나 돌아오는 길에 소래산 묘소에 알묘(謁墓)한 다음 하원홍이 선대 위토를 함부로 팔아먹은 사실을 읍에 아뢰고 도에 아뢰어서 한 달이 지난 후에 도로 찾으셨다.

아, 우리 선조의 후손이 많아 헤아릴 수 없으나, 3대 묘소가 향화가 그치지 않게 된 것은 실로 공의 성력 때문이다. 이로부터 공이 과거를 단념하고 마음을 천석(泉石)에 붙여 날로 글을 읊으며 세월을 보냈셨다.1877년 8월 20일 병환으로 본댁에서 별세하시니, 향년 52세였다. 부고를 듣고 친척과 사우(士友)들이 모두 슬퍼하고 탄식하며 이르기를 「1년 안에 공의 형제가 함께 고인이 되니, 우리 도의 액(厄)과 우리 유교의 비운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고?」하였다. 이 해 10월 나대촌(羅岱村) 안산 묘좌(卯坐)에 장사되셨다. 배위는 은진송씨(恩津宋氏) 유선의 따님이요, 쌍청당(雙淸當) 유(愉)의 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