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포공(錦圃公) 하상진(河尙晋)27세손

선비가 때를 만나고 못 만남은 운명이요. 도(道)가 행해지고 못 행해짐도 시운(時運)이다. 우리 선부군(先府君)이 문장과 덕행으로 한 세상에 드날렸을 뿐 아니라 만일 나라의 중임을 맡으셨으면 지모(智謀)와 역량(力量)이 능히 큰 사업을 이루었겠는데 불행이 말세를 만나서 끝내 포의(布衣)로 산골에서 평생을 마치셨으니 이 어찌 선비의 불우함과 운수의 기박함이 아니겠는가? 부군의 휘는 상진(尙晋)이요, 자는 백유(伯裕)요, 금포(錦圃)는 호이다. 1826년 4월 22일 아우님 금남공(錦南公)과 쌍태(雙胎)로 태어나셨다.

천품이 탁월하고 재주가 뛰어나서 겨우 말을 배우면서 글자를 아시니 그 증조부님 경당공(敬堂公)께서 기특하게 여기어 매양 말씀하기를「우리 집을 일으킬 사람은 이 두 아이다,」하셨다.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날로 수백 어(語)를 기억하였다. 아홉 살 때 조부님 장씨(張氏)가 별세하시어 부군이 아우님 금남공과 더불어 조상(조喪)을 받는 절차를 어른과 같이 하니, 조문하던 친척들이 모두 칭탄하기를「열 살도 안 된 사람이 범절이 이와 같으니 후일의 성취를 어찌 측량할 수 있으리요?」하였다. 조부님 천산공(天山公)은 소시부터 문학과 행실로 한 세상에 이름 나셨다.또 성품이 엄격하고 법도가 있으셔서 자질(子姪)으 교육함에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중하게 매질하여 끝내 용서치 아니하셨다. 부군 형제에게 명하여 산재(山齋)에서 글을 읽게 하고 날마다 가서 강학(講學)하셨는데, 조금이라도 게으름이 있으면 피가 나도록 매질하시니 부군이 이로부터 공부에 열중하여 열 두세 살 때 능히 글을 지으셨다. 그 때, 조정에서 과거로 선비를 채용하니 세상 사람들이 과거 공부로써 공명을 다툼에 분주하였다, 부군이 역시 사장지학(詞章之學)으로 당세에 이름나니 사람들이 문단의 원수(元帥)라 지목하였다.

열 여덟 살 때 진주에서 보이던 도 시험(道試驗)에 합격하고, 스물 한 살 때 의령(宜寧) 향시(鄕試)에 합격하니, 천산공께서 경계시키기를「문예(文藝)는 말단(末端)이요 성리(性理)는 근본이니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취함이 어찌 선비의 도리일까?」하시니 부군이 이 말슴을 들으신 뒤로 성리학(性理學)에 잠심하여 태극 이기(太極理氣)와 4단 7정(四端七情)을 다 터득하였는데 더욱 역림산수학(易林算數學)에 정밀(精密)하셨다.26세때 천산공이 별세하심에 초종 상담(初終喪담)을 주자(朱子)와 퇴계(退溪)의 예법을 좇아 하였는데 애통하심이 과도하였다. 해상(解喪)후 이연(伊淵)에서 유계(儒계) 문회(文會)를 베풀 때 이종상(李鍾祥)이 낙동강 동쪽에서 문장으로 명망이 높은 분이었는데, 당시 개령(開寧) 원(員)으로 이연(伊淵)의 선비들을 시험하는 자리에 와서 부군의 문장이 뛰어났음을 보고 탄복하여 말하기를「내가 강좌(江左)에 살면서 그대의 이름을 들은 지 오래더니 이제 만나 보니 진실로 특이한 재사로다. 세상에 쌍태(雙胎) 형제가 흔히있으나, 어찌 그대 형제 같은 사람이 있으리요? 문장과 필법은 육가(陸家)의 기운(機雲)과 같고 얼굴 분간하기 어려움은 장씨(張氏)의 모해(模諧)와 같으니 기특하고 기특하도다」하였다. 이로부터 서신 왕래가 계속 끊어지지 아니하였다.

1866년에 대구(大邱) 책문 시험(策文試驗)에 합격하였고, 1867년에 조정에서 보이는 시험을 보기위해 서울에 가서 참판 정현덕(鄭顯德)과 날마다 시를 읊으셨다. 1877년 4월 8일에 별세하시니, 향년 52세였다. 부고(訃告)를 듣고 원근 사람들이 슬피 탕식하여 말하기를「금포공이 돌아가셨는가? 우리 도(道)가 끝장났고 유교 문화가 사라진다」하였다. 부인은 영천 최씨(永川崔氏) 영승(永升)의 우리 따님이요, 죽헌(竹軒) 항경(恒慶)의 후손이다. 산소는 야로(冶爐) 매촌 석현 고조고 산소 아래 갑좌(甲坐)이다. 이 해 8월 20일에 금남공이 또 별세하셨으니 슬프다, 하느님이 우리 부군 형제를 낳으심이 심상치 않았는데 별세 또한 같은 해였으니, 어찌 통탄치 않을 수 있으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