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포공(隱圃公) 하덕구(德九)27세손

공의 휘는 덕구(德九)요 자는 원서(元瑞)로 진양하씨이다. 시조는 고려조 사직공(司直公) 휘 진(珍)이시며 조선조에 들어와 문효공(文孝公) 휘 연(演)은 영의정(領議政)을 지내셨고, 증좌찬성(贈左贊成)에 오른 사과공(司果公) 휘 극성(極成)은 호가 낙은(洛隱)으로 공의 8대조이시다. 고조(高祖)는 서강(瑞江)이시고 증조(曾祖)는 응태(應泰), 조(祖)는 흥신(興臣)이시며 선고(先考)는 언권(彦權)으로 행장에 함께 갖추어져 있다. 비는 여양진씨 진사(進士)의 여(女)로 규범(閨範)에 익숙하여 어긋남이 없었으며 1837년 11월 11일 진양(晋陽)의 신당(新塘)에서 공을 낳으셨다. 이미 장성하여 전에는 농하로 불리었던 신구리(新龜里) 취성(鷲城)에 돌아오니 소박한 성품은 청아하여 명리(名利)에 굴하지 않고, 마음을 다스려 분수를 지키셨고, 농사를 지으면서도 책을 읽으며 그곳에서 사시며 호를 은포(隱圃)라 하셨다.

은포공(隱圃公)이 시(詩)를 지으니 그곳에 담겨있는 뜻을 살펴보면 포전(圃田) 수백보(數百步)만으로 돌아오니 부귀에는 뜻이 없음이라, 안빈낙도(安貧樂道)하시고 다시 덕을 쌓으니 종족(宗族)에게 화목한 얼굴로 대하고 오래 알고 지내는 사람에게는 우애하셨으니 사람들 모두가 기뻐하는 마음으로 받들고 부러워하는 모습이더라. 71세에 통정대부 용양위 부호군의 품계에 올랐으며, 1907년 3월 15일에 졸(卒)하시니 신구리 약천산 간좌천(艮坐阡)에 장사하였다가 신구리 성지산 진좌천(辰坐阡)에 이장하였다. 배(配)는 숙부인 김해김씨(金海金氏)로 판결사(判決事)를 지내신 성우(聲佑)의 따님이시며 탁영선생(濯纓先生) 일(馹)의 후손이다.

묘는 고을 남쪽 당포리 당산 자좌원(子坐原)이며 고을 서쪽 장마면 신구리 성지산 진좌원으로 이장하였다. 3남 2녀 두셨으니 장남은 통덕랑(通德郞) 상규(祥奎)로 효성이 지극하였고 차남은 한규(漢奎)이고 삼남은 보규(寶奎)이다. 따님은 청주한씨(淸州韓氏) 문(文)과 김해김씨(金海金氏) 인두(仁斗)에게 각각 출가(出嫁)하였다. 상규(祥奎)는 진용(鎭容), 호용(昊容), 우용(宇容), 문용(汶容), 석용(錫容) 등(等) 5남을 두었으며, 사위 한문(韓文)은 2남을 두었으니 장균(章均), 장석(章石)이고, 그리고 사위 김인두(金仁斗)는 1남 용범(容範)을 두었다. 상규(祥奎)의 아들 우용(宇容)군이 행장을 가지고 와 나에게 징험(徵驗)하여 묘비(墓碑)에 새기기를 청하니 행장을 살피어 명(銘)에 이르기를,

수 묘의 전원(田園)이 있으니 넉넉하구나.

졸(卒)하시니 세(歲)에 세력이나 이익을 얻기 위해

노력함이 없었으니 행장을 부여하노라.

나는 참으로 오래 살아서 다복하구나.

구지강(龜之岡) 일편석(一片石)에 영원한 세대(世代)에

감히 옳은 말로써 표하노라.

경진년 2월 합천 이직현 삼가 짓고 영산 신용출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