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하석홍(錫洪) 27세손

        휘 석홍(錫洪)선조님의 유허비(遺墟碑)
1786(정조 10)∼1834(순조 34).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진양(晋陽)자(字)는 성칙(聖則), 호(號)는 신암(愼菴)이며 참판공 효명할아버님의 증손자 충노(忠老)선조님의 후손으로 창녕 계팔 출신이시며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했다 . 아버지는 첨지중추(僉知中樞) 계해(啓海)이며, 어머니는 연안차씨(延安車氏)로 재태(載泰)의 딸이다.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다음해 성균관 학유에 임명되었고, 박사·전적을 거쳐 예조정랑에 올랐으며, 1825년 사헌부 지평으로 승진하였다. 관직에 있는 동안 상소로써 국정을 논하여 성지(聖志)를 가다듬어 성학(聖學)에 근면할 것, 기강을 진작하여 조정을 바로잡을 것, 의로운 것을 일으켜 해로운 것을 제거할 것, 인재를 수용하여 정무를 처리할 것, 신(信)으로써 상벌을 분명히 할 것, 용도를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할 것 등을 진언하였다.

 선생은 특히한 기질을 타고나서 언어가 법도가 있으시며 성리학을 깊히 연구하여 모두 통달하셨다  선생께서 1834년9월22일에 돌아가셔서 부음을 임금께 아뢰니 순조께서 직접 예조에 명하여 부의를 하셨다 영남의 명현으로 당시에 한양에서 벼슬하고 있는 사람은 친척같이 슬프하고 승지 성대진은 친히 수렴하여 천리길에 반장하게 하고 망장2수를 지었으며 성인호는 찬을 짓기를

"빛나는 이름을 세상에 떨치고

 남은 빛은 가문을 빛내었네

 쌓은 도량은 측량하지 못하리라.

하였다. 저서로《신암유고》가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창녕의인물 前 통일주체 국민대의원과 경상남도 도의회 의원을 지내신 계팔 신기동에 장손이신 故 하태천(河泰天)씨가 이분의 5대직계 후손이다


사헌부지평 휘 석홍(錫洪)선조님을 모신 사당: 경남 창녕군 고암면 계상리 계팔

신암공(愼庵公) 하석홍(錫洪) 행장

공의 휘는 석홍(錫洪)이요 자는 성칙(聖則)이요 신암(愼庵)은 그의 호다. 하씨는 진양 대족(大族)인데, 공은 조선조 명상 문효공 경재 휘 연(演)의 후예이다. 훈련원부사 휘 효명(孝明), 현감 휘 복산(福山), 현감 휘 징으로 이어졌는데, 이 분의 4대 후손 휘 수연(壽淵)이 임진난을 만나 어머님을 모시고 창녕으로 피난하게 된 후로 자손이 창녕 사람이 되었다. 증조님 휘 재청(再淸)은 수 판관이요, 조부님 휘는 광윤(光潤)이다. 황고님 휘 계해(啓海)는 공이 시종(侍從)으로 있은 덕택으로 통정에 올라 첨지중추부사를 배수하였는데, 근신하는 몸가짐으로 고을 사람의 추앙을 받았다. 선비는 숙부인 연안 차씨인데, 재공(載恭)의 따님이다.

1786년 10월 2일에 공이 창녕군 고암면 계상리 계팔(桂八)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특이한 성질이 있어, 입에 나쁜 말을 담지 아니하고, 글을 배우기 시작한 후로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여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아니하였다. 점점 자라서 아버님 명으로 과거 공부를 할 때 상투를 달아 매고 밤을 새우더니, 몇 해 동안에 7서를 숙독하셨다. 1819년에 문과(文科)에 뽑혀 이듬해에 성균학유(成均學諭)를 배수한 후 학록(學錄), 학정(學正)을 거쳐 1821년에 성균관박사가 되고 1823년에 6품에 전적(典籍)이 되었다가 조금 후 봉상주부로 옮긴 뒤 다시 전적이 되시고, 예조정랑(藝曹正郞)으로 옮겨셨다. 1825년엔 사헌부 지평을 배수하였다. 1832년에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어 취임하자 곧 사리를 살펴 적절하게 처리하시니, 상사(上司)가 그 수직경근(守職敬謹)함에 탄복하였다.

1834년 9월 22일에 병환으로 반저(泮邸)에서 별세하시니, 영남 선비들이 모여 통곡하되 친척같이 슬퍼하였다. 승지(承旨) 성대진(成大璡)이 직접 검습(檢襲)에 임하고 만시(輓詩)를 지어 슬퍼하며 이르기를 「젊은 임금이 자못 총명하고 어지심을 영혼이 혹 아시는가?」하였으니, 이는 대개 공의 재기(才器)를 성왕(聖王)께서 허여(許輿)하시는 바이니 앞길이 바야흐로 형통할 것인데, 공이 돌아가시어 알지 못하게 된 연고로 한 말이다. 청도군 풍각면 금동 유조원에 장사되었다. 배위 숙인 밀양박씨(密陽朴氏)는 순화의 따님이다. 두 아드님 시영. 대영(大永)이 다 통덕랑(通德郞)이고, 따님들은 설민석(薛敏碩). 이병간(李幷幹). 성조근(成祖根)의 부인이다. 손자는 덕수(德受). 덕장(德章). 덕로(德魯). 덕구(德球). 덕희(德羲)이다.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공이 간원(諫院)에 계실 때 재변(災變)이 있어 응지소(應旨疎)를 올렸는데, 그 말이 다 성지(聖旨)를 세우고 예학(睿學)에 힘쓰게 하며, 기강(紀綱)을 진작(振作)하고 조정을 안정하게 하며, 공(公)을 넓히고 사(私)를 버리며, 이(利)를 일으키고 해(害)를 덜며, 인재를 찾아들이고 혼란을 가라앉히며,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부역을 경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여덟 가지 폐단을 진술한 책문에서 말씀하기를 조정을 안정시키고자 하면 화협(和協)할 정치를 하는 데 힘써야 하며, 국방을 튼튼하게 하고자 하면 반드시 방어지책(防禦之策)을 굳게 하여야 하며, 돈문지교(敦文之敎)를 흥기시켜야 하며, 원정지방(爰整之方)을 완비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인심을 올바르게 하고 사기를 진작시켜야 하나니, 이것이 왕도정치(王道政治)에서 마땅히 먼저 할 바요, 하늘의 노여움에 응답하고 백성의 원망을 잘 풀어 줌이 정치에 있어 마땅히 급히 할 바라 하셨다. 또 용인책(用人策)과 언행책(言行策)이 있어 사람들이 전송(傳誦)하였다.일찍이 태학관에서 공부할 때 하루는 관(館)을 지키던 사람에게 명하여 담장이 낮으니 좀더 쌓아 올리게 하였는데, 이는 대개 공의 풍채가 아름다워서 이웃에 살던 여자가 어여쁜 태도를 자주 보이기 때문이었다. 공이 과거하기 전에 글을 많이 읽는다고 세상에 이름나서 사대부들이 지금까지 자제들을 면학시키는 말을 할 때 반드시 숙독하기를 영남 하지평(河持平) 같이 한 연후에야 학업이 진취한다고 하여 왔다. 별세하신 100여년 후에도 공의 치업의 공적이 사람에게 퍼져 있으니, 또한 기이한 일이다.

운규(運奎)의 아들 진동(鎭東)과 명규(明奎)의 아들 진태(鎭兌)와 공의 재종인 익영(益永)이 가전(家傳)을 가지고 와서 나 상직(相稷)에게 장덕지문(狀德之文)을 부탁하는 바, 이는 상직이 글을 잘해서가 아니라 혹 향리에 구문(舊聞)이 있어 그 불급(不及)한 일에 보충이 되기를 바라서이다. 아! 우리 고을에 예로부터 문행신사(文行紳士)가 많으나 한 동네에서 6 인 급제(及第)가 이.삼십년간에 빛남은 계팔리 뿐이다. 이러므로, 고을 사람이 종종 6공의 일을 말함이 모든 사람의 귀에 익어서, 나도 또한 들어서 알고 있다. 공이 집안이 가난하고 부모님이 늙으심을 걱정하여 적은 녹봉을 감히 자신의 먹고 입는 데 쓰지 아니하고, 반드시 부리는 사람을 시켜 부모님 계신 집에 보내어서 조석의 공양을 잇고 남음이 있으면 수구(壽具)를 갖추고 또 남음이 있으면 위토(位土)를 사셨다. 문효공 영당에 제수(祭需)가 부족하면 방백(方伯)에게 알려서 보충하게 하셨다. 아드님의 실학(失學)을 염려하여 글을 보내 경계시켜 부모 섬기고 몸 다스리는 방도를 알 게 하셨으니, 이에서 늙은이 섬기신 순수한 정성과 제사 받드신 지극한 뜻과 후손에 정신을 물려주신 양전(良詮)을 상상할 수 있다. 이제 그 유문(遺文)에서 부모님께 올린 글과 방백에 알린 글과 학문 권장한 글을 보니, 전에 들은 말이 틀림없음을 알겠다.

태학관 종유(從遊)의 성하였음은 동화록(同話錄)에 증명되어 있고, 공사간 사로 도운 사실은 상서 이효순(李孝淳). 대간 이연상(李淵祥). 승선 김대곤(金大坤). 양산 신석림(辛碩林). 정언 김치곤(金致坤). 헌납 손석지(孫錫祉). 교리 김석희(金錫熙). 정언 우석간(禹錫簡). 장령 우석문(禹錫文) 제공의 글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다만, 총권(寵券)이 바야흐로 융성해지려 하였으나 능히 기다리지 못하셨고, 부모님의 노령(老齡)이 아침저녁 사이로 위태하였는데 봉양을 다하지 못하신 것이 가장 통석한 일이다. 어느 겨울에 그 소절세행(疎節細行)을 늘어놓으리요? 삼가 썼노라.

 묘소 : 청도군 풍각면 금동 유조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