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암공 휘(諱) 영청(永淸)선조님의 묘소
 

병암거사공(屛巖居士公) 하영청(河永淸)25세손

공의 휘는 영청(永淸)이요 자는 천기(千期)이다 1697년 6월 20일에 복천(福川)의 사촌(沙村)에서 태어났는데 천품이 온화 순수하고 총명이 뛰어났다. 나이 겨우 열 살이었을 때 선고 상을 당하였는데 조석의 제전(祭奠)과 빈객의 조위에 반드시 두 형님을 따라 예를 다하였고 잠시도 여막을 떠나지 않았다. 글 읽기를 매우 부지런히 하여 모친의 회포를 위로하였다. 사략(史略)을 다 읽음에 종조부님 월담공(月潭公)이 통감을 가르치려하니 공이 사양하여 말하기를「역사란 고금의 차란과 인물의 현부(賢否)를 볼 수 있는 것이 따름인데 듣자오니 사람의 자식으로 해야 할 일이 소학에 있다 하니 그것을 배우기를 원합니다」하니 월담공이 크게 기특하게 여기셨다. 열 세 살에 선비 상을 당하여 상례 행하기를 성인과 같이 하였다.

그 후 더욱 학문에 전심하여 밤낮으로 읽고 외어 침식을 잊으므로 두 분 형님이 혹 병이 날까 염려하여 지나치게 하지 말라고 경계시키니 공이 울면서 말씀하기를「제가 일찍이 선친을 여의었는데 만약 또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남이 형님을 나무랄까 두려우니 이를 생각하면 어찌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차츰 성인(成人)이 되어감에 문장과 행동이 노성한 선비와 같았다 왕희지(王羲之)의 서법첩(書法帖)을 공부할 때는 종이를 늘 갖출 수 없었으므로 나무판에 연습하면서 한 점 한 획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반드시 그묘법을 얻고야 말았다. 또 형제 간의 우애도 매우 돈독하였다. 장가드신 뒤에는 문장과 논변이 드러났었다.

백씨(伯氏)가 돌아가신 후로 과거 공부를 폐하고 정성을 쏟아 자질(子姪)가르치기를 일로 삼으셨으며 글 읽는 여가에 집안 일을 돌보아 작고 큰 일을 빠뜨림이 없이 하셨다. 일찍이 말씀하기를「세상의 학자들은 일상생활의 할 일을 벗어던짐을 고상한 일로 삼으나 우리 선비들의 가계(家計)가 진(晋) 송(宋)의 첨담(淸談)하던 사람들과 같지 않으니 위로 섬기고 아래로 기를 자료를 어찌 생각지 않을 수 있으리요?」하셨다. 드디어 살아 가는 일을 경영하여 마침내 부자가 되었으나 남들이 일찍이 하루도 글 읽지 않는 날을 보지 못하였고 재리(財利)에 구차하게 기뻐하는 일을 보지 못하였다.서실(書室)을 부모님 묘 옆에 짓고 날마다 묘에 성묘하였다. 손수 소나무를 심어서 울창하게 우거졌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 정성에 감동하여 감히 침벌(侵伐)하지 못하였다. 선대 묘소의 위토를 힘을 다해 마련하여 세제(歲祭)를 받들 게 하였고 방친(傍親)들의 후사가 없는 묘도 역시 그렇게 하였으며 또 약간의 전토를 두어 종족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게 하셨다. 대개 집안에 거하여 제용(制用)하는 규모가 매우 치밀 하고 성품이 남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여 마을의 이웃들이 공을 받들며 먹고 사는 사람이 많았다,

어떤 거지가 문앞에 와서 쌀을 빌면서 말하기를「일찍이 부모를 여의어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라고 하므로 공이 그 생김새가 보통과 다름을 보고 물으신 바 곧 옛 친구의 아들이었으므로 매우 불쌍히 여겨 글방에 머물러 있게 하여 글을 가르쳤더니 몇 년 만에 학문이 크게 진보하여 더 공부하려는 뜻이 있었으므로 공이 서찰을 김미호(金渼湖)에게 부탁하여 크게 학문을 성취하게 하셨다. 일에 응하고 사물에 접함에 관후함을 다하였고 비록 하인들일지라도 악한 말로 꾸짖는 일이 없으셨으며 작은 아름다움이나 장점이 있으면 반드시 곡식이나 주식(酒食)을 주어 장려하셨다.

남의 착함을 들으면 자신이 한일처럼 기뻐할 뿐만 아니라 두루 고을에 칭찬이 퍼지게 하였으며 남의 악한 짓을 보면 갑자기 소리내어 꾸짖거나 얼굴빛을 바꾸거나 하지 않고 얼굴을 바로 하고 가만히 앉아 있어 스스로 두려워할 줄을 알 게 하셨다. 어릴적에 집안에서 물건을 잃어 버린 일이 있어 백씨(伯氏)가 집안 아이들을 모아 놓고 힐문 하였으나 훔친 자를 찾지 못하였으므로 공이 한 아이의 기색을 살펴보고 밤에 가서 조용히 물으시니 과연 자백하므로 그 물건을 그전 있던 곳에 갖다 두게 하고 집안 사람들은 모르게 하셨다. 일찍이 외출하였을 때 어떤 술취한 자가 길을 막고 망령된 말을 많이 하였는데 술이 깬 뒤에 와서 벌받기를 청하므로 공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씀하기를「어젯 일은 네가 한 짓이 아니고 술 때문에 그런 것이니 다만 네가 술을 끊는다면 어찌 반드시 벌을 주랴?」하시니 그 사람이 감동하여 술을 끊고 마침내 근신하는 사람이 되었다.

중부(仲父) 정묵공(靜默公)이 노하여 읍리(邑吏)를 매질하려 하실새 읍리가 불손한 말을 하므로 공이 나가 말씀드리기를「저 사람은 이미 정신이 나간 사람이니 오래 되지 않아 죽을 것입니다.」하시고 청하여 매때리지 않고 돌려 보내게 하였는데 그 이튿날 과연 죽었다. 마을의 자제님들에게 허물이 있으면 꾸짖기를 매우 간절히 하시되 일이 지나면 곧 잊어 버리므로 남을 원망하는 말이 없었다 만약 의문스럽고 어려운 점이 있으면 공에게 가서 결정하는 일이 많았다.일찍이 말씀하기를「호수(戶數)에 편성되어 부역에 응하는 일은 국민으로서의 직분이나 빈부(貧富)가 고르지 못하여 때를 맞추지 못할까가 두려운 점이다」하시고 드디어 방인(坊人)들로 더불어 약간의 재물을 모아 힘써 이식을 불리니 무릇 한 마을의 부역과 부세가 모두 이를 의지하게 되었다. 또 그 나머지를 보존 하여 흉년에 대비하고 혼인하는 데 시기를 잃거나 상장(喪葬)에 기일을 지나치게 되거나 수화(水火)의 재변이 있거나 할 때 돕고 구제함을 남전고사(藍田故事)와 같이 하게 하셨다.

향약(鄕約)을 만드셨는데 그 향약 조문은 퇴계(退溪)율곡(栗谷) 두 선생이 행하게 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늘 마을 자제들을 모아 강론하는 자리를 만들고 어려움을 묻게 하였으며 또 내칙(內則) 소학(小學) 여계(女誡)등의 서적에서 부인들의 올바른 행실에 절실한 대문을 골라서 한글로 번역하여 부인들에게 주어 익히게 하셨다. 서적을 많이 비치해 두고 또 사서 모으는 데 인색하지 않으셨다. 일찍이 주자어록(朱子語錄)을 구하다거 얻지 못하던 터에 마침 팔려고 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값을 치를 길이 없었으므로 밭 갈던 소를 쟁기를 벗기고 주었다. 남이 빌어 보기를 청하면 어려운 기색 없이 빌려 주었고 숙독(熟讀)하기를 면려하셨다. 만년에 남병(藍屛)의 자연을 사랑하여 정사(精舍)를 지어 노니시며 쉬는 곳으로 삼아 스스로 호를 병암거사(屛巖居士)라고 하셨다.일 실(一室)이 호젓한데 도서를 벽에 가득히 쌓아 두고 해지도록 단정히 앉아 정신을 연마하고 생각에 잠겨 늙어짐을 깨닫지 못하셨다. 한가한 날은 동자를 데리고 천석(泉石)과 운연(雲烟)속을 거닐실새 그 맑은 모습이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듯하였으니 보는 사람들은 신선 속에 사는 분이라 하셨다. 널리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백가서(百家書)에 방통(傍通)하셨는데 더욱 소학(小學)과 용학(庸學)에 힘써 비록 80세가 되었어도 반드시 아침 저녁으로 외우셧다, 주역(周易)과 성력(星曆)과 음양(陰陽)에 방통하지 않음이 없었고 이기(理氣)와 심성(心性)의 근원도 연구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말씀하기를「명덕(明德)엔 성인과 범인의 분수가 없는 것이요 마음과 명덕을 말할 때는 다만 마음의 허(虛)와 명(明)을 가리킬 따름이어서 기품을 함께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셨다. 또 인물의 성품을 논하여 이르기를「성(性)과 도(道)의 동이(同異)는 이기(理氣)의 이합(離合)에 있는데 위암(위巖)은 합하는 것을 설(說)하여 과도히 분수에 빠졌고 남당(南塘)은 이(離)를 설하여 과도히 지위를 점유하였다.」고 하셨으니 가히 공의 학문함이 스스로 얻은 곳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평생에 잡기(雜技)를 가까이 하지 않으셨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요(堯)임금도 바둑을 지어서 이를 단주(丹朱)에게 가르쳤다고 합니다」하므로 공이 꾸짖어 말씀하기를「그대가 어찌 남의 자제들을 잘못 되게 하는고? 무릇 사람의 마음과 손과 눈은 잠깐 동안이라도 한방(閒放)할 수 없는 일이거니 평생 동안 일을 하여도 다할 수 없거늘 하물며 쓸 데 없는 잡기에 힘을 쏟겠는가?」하셨다. 보통 때는 예로써 몸을 닦아 비록 환난의 때를 만날지라도 법도를 어김이 없으셨고 심한 병환이 아니면 하루도 의관의 정제를 폐하지 않으시되 연세 많음에 이르러서도 그리 하셨다.

부모님 제삿날이면 애통하기를 초상 때와 같이 하였으며 상중에 부모님 회갑 날을 맞아서는 종일 토록 묘에서 통곡하시니 지나가던 사람이 듣고 역시 슬퍼 울었다. 벗의 부고를 받으면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정의가 두터운 사람이면 이삼 일을 그렇게 하셨다. 1771년 정월 초하룻날 겸(謙)괘이 명이(明夷)괘를 점쳐 얻고는 집안 사람들에게 말씀하기를「내가 죽을 시기가 순곤(純坤:10월)의 달일진저!」하셨는데 과연 이해 10월 10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75세였다. 아! 공은 자질의 순박함과 학식이 넓음과 재예의 아름다움이 세상에 쓰임에 족하였는데 마침내 어두움에 잠겨 돌아가셨으니 어찌 명(命)이 아니겠는고? 공이 어릴 때부터 늙을 때까지 날마다 일삼은 것을 실제에 힘을 쏟지 아니함이 없음이었기 때문에 그 말씀에 이르기를「세상의 학자들은 장구(章句)에 골몰하여 실득(實得)이 없다」하셨으니 이는 남명(南冥)이 이른 바 손으로는 물 뿌리고 쓰는 절차를 알지 못하고 입으로는 하늘의 이치를 말하는 자들은 영락없는 시폐적 인간이라 하였음과 같다.

일찍이 서찰로써 도암(陶菴) 이(李) 선생에게 의문스런 점을 질문하신 바 있었는데 도암이 그 서찰을 문인(門人)들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이 사람에게 실득(實得)이 있으므로 그 말에 실견(實見)이 있다.」하고 깊이 장려하였다. 당시의 윤병계(尹屛溪)와 김미호(金渼湖)와 송역천(宋역泉)과 권산수헌(權山水軒)등 제현들은 모두 공이 종유(從遊)하여 어려운 점을 강토하신 바여서 도의로써 허교한 터이었다. 김퇴어(金退漁)가 공을 한 번 보고 깊이 공경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가히 남중(南中)의 걸출(傑出)이다」라고 하였고 상서 유최기(兪최基)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어둠 속에서 모색한 분이었나 군자임을 알 만하다」하였다, 모든 명석(名碩)들에게 추허(推許)되었음이 이와 같았으니 성인(聖人)이 이른 바「노(魯)나라에 군자(君子)가 없으면 무슨 취할 바가 있으리요?」라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공의 평생의 대개를 이에서 징험할 수 있으니 세상에 명위(名位)가 현혁(縣赫)하였으나 죽어서 일컬어짐이 없는 자와 견줄 때 어떠한고?

유고(遺稿)약간이 집안에 소장되어 있고 묘는 팔산(捌山)동쪽의 매봉 아래 병좌에 있다 배위는 진주정씨인데 청천군(菁川君) 을보(乙輔)이 후예요 태래(泰來)의 따님이다. 정숙하고 고요하며 부덕이 있었는데 공보다 3년 뒤에 돌아가시어 합장되셨다. 한 분 아드님 휘 정철(廷喆)은 문행이 있었으나 일찍 돌아가셨다 손자는 3남 2녀인데 큰손자는 휘가 진성(鎭星)이요 다음은 진호(鎭皓)요 다음 은 진룡(鎭龍)이묘 손자 사위는 이태근(李泰根) 안수영(安壽永)이다. 현감 휘 백원(百源)과 계원(繼源)과 이상태(李象泰)의 부인은 진성의 소생이요 휘 길원(吉源)과 재원(在源)은 진호의 소생이요 휘 효원(孝源)과 이기섭(李基燮)의 부인과 고매진(高邁鎭)의 부인은 진룡의 소생이다. 그외는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5세손 임수(임秀)가 묘지명이 없음을 걱정하여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이며 글을 청하는 바 내 비록 그럴 만한 사람이 못되나 가만히 생각하니 마음 속에 경탄할 바가 있으므로, 드디어 졸렬함을 잊고 이와 같이 써서 그 뜻에 응하노라 이에 명(銘)한다.

뜻과 행동 돈독하고 재식(才識)은 몹시도 뛰어났네.

어찌 말세(末世)에서만 드물리요? 옛날에도 얻기 어려웠네

돌아가실 때까지 어둠에 잠겨 쌓으신 덕이 쓰이지 못하였나니

풍부한 재주를 주고 베풀기를 인색하게 하신 저 하늘은 무슨 뜻에서였던고?

아! 모든 명석(名碩)들이 장려할 줄 알아 빠뜨림 없었으니

백세 뒤에라도 이에 징신(徵信)할 수 있으리라.

매봉의 언덕에 넉 자의 무덤 있는데

하씨 기록을 얻지 못해 잠긴 빛 없어질까 두려웠네. 내가 비석에 기록하거니와

아, 공이여! 모두들 아름다운 유덕을 칭송하니 나의 말도 아첨함이 아니옵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