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덕랑공 하대명(河大明)24세손
 

하씨(河氏)의 선대는 고려 사직(高麗司直) 휘 진(珍)으로부터 시작되어 대대로 현달한 벼슬이 끊이지 아니하여 진양의 큰 문벌이 되었다. 9세에 이르러 진천 부원군(晋川府院君) 휘 즙(楫)이 원정(元正)이라는 시호를 받으셨고, 원정공의 손자님 휘 자종(自棕)은 군부상서(軍部尙書)로 계실 때 고려 운수가 다했음을 보시고 병을 칭탁하고 교향에 돌아가서 일생을 마치셨다. 호는 목옹(木翁)이다. 이분이 대사간 결을 낳으시니 : 곧 명상(名相)이신 휘 연(演)의 아우님이신데, 이분이 공의 12세조 이시다. 증조님 휘는 홍달(弘達)인데 : 증 좌승지(贈左承旨)요, 호는 낙와다. 조부님 휘는 철(澈)인데 : 증 대사헌(大司憲)이요, 호는 설창이다. 아버님 휘는 덕망(德望)인데 : 지평(持平)이요, 호는 양정재(養正齋)다. 어머님은 공인 광주 노씨(光州盧氏)인데, 증 지평 한보(贈持平漢輔)의 외손녀시요, 전주 최씨 우첨(全推崔氏宇瞻)의 따님은 그의 계모이시다.

공의 휘는 대명(大明)이요, 자는 진숙(晋叔)이요, 호는 한계(寒溪)요, 통덕랑은 그 음직이다. 공이 숙종 신미(1691)년에 나신 바 : 총명이 뛰어나고 문장이 일찍 성취되어, 20세 때 연하여 향시에 합격하셨으나, 때가 그 맑은 마음에 맞지 아니하여, 드디어 집에서 예의에 대한 학문을 읽히시니, 향중에서 정중히 여기었다. 일찍 이르시기를, 「사람이 예의를 모르면 어찌 짐승과 다르리요? 이 때문에 옛 사람이 쥐를 상보는 글을 지었다.」라고, 하셨다. 평생을 집안 아우님이신 괴전와(愧全窩) 대관(大觀)으로 더불어 한 집에서 강마(講磨)하는 즐거움으로 사시며 늙어 감을 모르시셨으니 : 세속이 말하는 벼슬의 영화를 뜬구름같이 보실 뿐만이 아니었다. 71세로 영조 신사(1761)년에 별세하시어 오대사 앞 내백호등 해좌에 안장되셨다.

배위 공인 이씨(恭人李氏)는 재령인(載寧人)이시니 : 언눌(彦訥)의 따님이시다. 6남, 4녀를 두셨다. 아드님 휘 응성(應聖)은 선전관(宣傳官)이요, 휘 경성(慶聖)은 글로 소문이 높았던 분이요, 휘 광성(光聖)은 첨지 중추(僉知中樞)요, 휘 필성, 길성, 일성이다. 사위님은 이 만해, 정 욱, 문 사현, 최 안악이다. 증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이제 공이 돌아가신 지가 3백여 년인데 아직 비석 한 좌를 묘 앞에 세우지 못하였으므로, 방손 도산 서원 재유사 유즙(陶山書院齋有司有楫)이 멀리서 서울에 있는 나의 집을 찾아 비석에 새길 글을 청하기로, 이에 명(銘)을 쓴다

오직 사람이 귀하다는 것은 삼강과 오륜이 있음이로이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세력과 이욕을 따르는 자이니,

끝내 반성하지 못하면 오륜이 멸하고 삼강이 무너지리라.

공이 이를 징계하여서 말아서 간직함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