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공(修庵公) 하경(河鏡)24세손
 

의령군 서쪽 칠곡면 외조리 응봉 아래 신좌(辛坐)에 네자 높이 쌍봉묘가 옳음을 간직한 우리 증조고와 증조비의 분묘이다. 부군(府君:수암공)의 휘는 경(鏡)이요 자는 규회(奎會)이며 호는 수암(修庵)이고 진양인이다. 고려 조현대부이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으시고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으로 증직된 휘 직의 부군을 비롯하여 이어 내려 오면서 빛나고 번성하여 부원군에 봉해지고 시호를 받으신 분이 아홉 분이 계신데 그 중 한 분인 경재(敬齋) 생 휘 연(演) 부군은 영의정을 지내고 문효공(文孝公)이란 시호를 받고 문종묘(文宗廟)에 배향되셨다. 문효공의 5세손 모헌(暮軒)선생 휘 혼(渾) 부군은 익위사세마와 장수찰방을 지내셨으며 승정원 좌승지로 증직되셨다. 고조는 휘 필원(必源) 호 동상옹(東相翁)이요, 증조는 휘 세위(世緯) 호 방촌(坊村)이요, 조부는 휘 심(深) 호 은재(隱齋)요, 선고는 휘 만호(萬灝) 호 롱재(聾齋)이고, 선비는 창녕조씨(昌寧趙氏) 창덕(昌德)의 따님인데 순후하고 인정이 두터우셨다.

공은 1805년 4월 26일에 태어나서 백부에게로 출계하였는데 어릴 때부터 생가와 양가에 순종하고 조상을 섬김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으며, 집안 다스림에 법도를 지켜 모범을 보였고 일가 친척과 주위 사람들을 감싸 주는 데 힘쓰셨는데 그 가엾게 여기는 마음은 고단한 사람에게도 미쳤다. 집에서 두 가정의 자질들을 경계하여 가르치기를 「모두 뭉쳐서 더욱 힘쓸 것이며 한 사람으로 인하여 배움을 잃는다면 어찌 한(恨)이 따르지 않겠느냐? 너희들은 면학에 힘써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공은 1883년 3월 23일에 향년 79세로 세상을 뜨셨다.배위(配位)는 진양강씨(晋陽姜氏) 이황(李璜)의 따님이며 은렬공 민첨(殷烈公民瞻)의 후예로 1804년에 태어나서 1886년에 83세로 돌아가셨다. 생시에 고요하고 단정하며 깨끗하고 여자의 범절을 다 갖추었으므로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공은 四男 一女를 두셨는데 아드님은 우택(宇澤), 우진(宇辰), 우청(宇淸), 우곤(宇崑)이고 사위는 강위수(姜渭秀)이다. 손자는 우택의 아들 단(檀), 정(檉), 동(棟)과 우진의 아들 정, 출계한 극(極), 동(棟)과 사위 이소원(李素源) 그리고 우청의 아들로 찰(札), 우곤의 양자 극(極)이 있으며 사위 강위수의 아들 몽치(夢致)가 있다. 증손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데 다만 증손 치만(致萬)과 현손 경호(慶鎬)는 종손(宗孫)이므로 기록한다.

아! 공은 남모르게 덕행을 실행하여 마땅히 집안을 일으켰고

문장이 빛났으나 이제 질병이 심하여 치료하기 어렵게 되니

집에서 기르는 짐승들도 걱정하였으며 얼마 후에 세상을 뜨셨다.

이 밖의 일은 생략하고 대강을 이와 같이 기록하는 바이다.


1935년 9월증손 치원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