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랑공 휘(諱) 하정도(河呈道)선조님의 묘소:전북 무주군 무풍면 철목리 온월천


 서악선생(西岳先生) 하정도(河呈道) 23세손
 

공의 성은 하씨요, 휘는 정도(呈道)요, 자는 경서(景瑞)요, 호는 서악(西岳)이요, 본관은 진양이니, 조선조의 어진 정승 경재(敬齋) 문효공(文孝公) 휘 연(演)의 10세손이다. 아버님은 사양재(四養齋) 휘 위국(衛國)인데, 향당(鄕黨)의 선생이었으므로 백산서원(栢山書院)에 배향되셨다. 어머님은 안동 김씨(安東金氏)다. 공이 1603년에 출생하여 일찍부터 가정의 교육을 받았는데, 특히 시부(時賦)와 책문(策文)에 능하였고 1635년에 생원시(生員時)에 합격하고, 1646년에 대과(大科)에 응시하여 갑과(甲科) 제 2 등으로 합격하여 사옹원직장(司甕院直長)을 배수(拜受)하였으며, 1658년엔 수부원외랑(水部員外郞)이 되었고, 이듬해에 옥구현감(沃溝縣監)이 되었다가 얼마 후 이조좌랑(吏曹左郞)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館)이 되었다

이 때에 임금이 대신들에게 묻기를 「기사관 하정도(河呈道)가 새로이 조정(朝廷)의 반열(班列)에 올랐는데 그 사람의 도량이 어떠한고?」하니 송준길(宋浚吉)이 대답하기를 「이미 경학(經學)에 명통(明通)하였으니 어찌 취할 바가 없겠사오리까?」하였고, 송시열(宋時烈)이 말하기를 「일찍이 그 사람을 안 바가 없사옵니다」하였다. 지례현감(知禮縣監)을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고 쓸쓸히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이렇게 한 것은 당시 당론 다툼이 심하여 화가 반드시 일어날 것이므로 오래 머무르는 것이 옳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향리로 돌아와서는 학문의 강론을 멈추지 않아 훌륭한 제자들이 많이 나왔으며, 퇴폐한 풍속이 바로 잡혔다.

상을 입고 있는 동안 예절을 다 지키고, 영모록(永摹錄)을 지어 애모(哀慕)의 정을 붙이었으며, 항상 자질(子姪)과 제자들에게 말하기를「한소열(漢昭烈)의 말처럼 악(惡)은 비록 작을지라도 하지 말아야 하고, 장공예(張公藝)의 말처럼 참을 인(忍)자 한 글자를 종신토록 새겨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공이 비록 벼슬에서 물러나 초야에 묻혀 지냈으나 우국(憂國)의 정성은 더욱 깊어져 옛날 벼슬에 있었을 때 일을 회상하여 말씀하기를 「내 옛날 임금의 부르심으로 입시(入侍)한 것이 열 일곱 번이었거니와 초야의 미약한 존재로서 손에 사필(史筆)을 잡고 임금의 얼굴을 지척에 모셔 임금의 음성이 정다우시고 향내음이 소매에 가득하였었으니, 때로 생각이 그 일에 미치면 황홀하여 몸이 대궐에 있는 듯하니라」하고 당일(當日) 기사(記事)의 전말을 추록하여 임금을 그리워하는 심사를 풀었다.

1665년 11월 19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63세였다. 묘는 무주 철목(哲木)의 온월천(溫月川) 유좌에 묘셔졌는데, 이는 선영이 계신 곳이다. 후에 백산서원(栢山書院)에 배향되었다. 두 분 배위는 벽진 이씨(碧珍李氏)와 연일 정씨(延日鄭氏)인데, 모두 숙인(淑人)이다. 고조. 증조. 조부 및 자손록은 가지고 온 행장에 빠졌으므로 쓰지 못한다. 이제 먼 후손 원준(垣準)이 모종(侮鐘). 홍광(洪光)과 더불어 비석을 세우려 하고 그 비석에 내 글을 새기려 하므로, 이에 명(銘)한다.

성현의 글 읽으심은 해야 할 일 하기 위함이라.

아름답고 좋은 벼슬을 이루시니 즐거움이 장차 그지없으리러니,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가심은 당쟁인(黨爭人)들이 방해함으로였네.

어찌 과연 잊을 수 있으리 군신간의 정사(情思)를? 기사록(記事錄)을 지으시니,

그 말씀 청비(淸悲)하네. 돌을 쪼아 묘비를 세움에 나에게 시를 짓게 하였네.

 

자(字)는 경서(景瑞), 호(號)는 서악(瑞岳), 1646년(인조24) 문과에 급제(及第)한 후 기사관(記事官)이 되어 왕의 총애를 받자 반대파의 시기에 못이겨 사임하고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학문 연구에 힘썼다. 그는 대덕사(大德祠)와 백산서원(栢山書院)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서악집(岳集)」을 저술하여 전하였다.

 

하형도(河亨道) 23세손

자(字)는 명서(明瑞), 호(號)는 취은(醉隱). 저선에서 학자로 명성을 얻었고, 백산서원(栢山書院)에 제향되었다

하현도(河顯道) 23세손

자(字)는 휘서(輝瑞), 호(號)는 모정(茅亭). 조선의 학자(學者)로 백산선서원(栢山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