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은자(狂隱子) 하석징(河碩徵)22세손

조선조 선조 때에 영남에 세 광사(狂士)가 있었는데 우리 고을의 광은자(狂隱子)하공이 그 한 분이시다 공의 휘는 석징(碩徵)이요 자는 회일(會一)이다. 강개(慷慨)한 큰 뜻이 있어 기이한 기백으로 자부(自負)하여 세리(勢利)의 분화(芬華)함을 보면 멸시하듯 하셨다. 젊었을 때에 이소경(離騷經)과 어부사(漁父辭)를 읽으면서 울먹거리시다가 몇 줄 아래의 이사전(李斯傳)에 이르러서 문득 이를 갈고 머리를 곤두세워 세인(世人)의 올바른 길을 등지고 욕심에 눈이 어두워 서로 빠져 돌아설 줄 모름을 분하게 여기셨다, 늘 길 게 울분을 노래함을 금방 통곡할 것같이 하셨다.

남과 면대한 자리에서도 남의 과실을 용서하지 못하여 침을 뱉고 돌아보지 않으시니 이로 인하여 미친 사람으로 지목되셨는데 공이 이르시되『진실로 그러하다, 내가 아니면 누가 미친 짓을 감당하겠는가?』하셨다. 그러나 인륜을 좋아하시어 당시에 어진 행동과 드러난 소문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천 리를 꺼리지 아니하였으며 그 곳을 지날 때는 반드시 읍(揖)하여 공경하는 마음을 표시하셨다. 마을의 변 모(卞某)라고 하는 사람은 서족(庶族)이었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정려문(旌閭門)이 세워졌는데도 마을의 사대부(士大夫)들은 대접하기를 예전이나 다름없이 하였다. 공이 말에 안장을 갖추고 그 의 집에 나아가 억지로 효자를 태우고 몸소 고삐를 잡아 앞에서 인도하여 어느 한 곳에 이르니 선비들이 많이 모였으므로 공이 효자를 부축하고 좌석에 올라앉아 응대(應對)하는 예절을 매우 공손하게 하시니 좌석에 있던 선비들이 서로 눈짓을 하며 말하길『이렇기 때문에 미쳤다고 하지.』하였다, 그러자 공이 돌아보고 꾸짖어 이르시되『당신들은 진실로 좋은 집안 자제들이라 부조(父조)의 세력을 바탕으로 하여 성현의 글을 읽었으나 과연 능히 자식의 직분에 힘써 부모에게 수치를 아니 끼침을 누가 변 효자(卞孝子)와 같이 하는고? 효자는 비록 신분은 낮으나 근자의 행실이 있지 않은가? 옛날의 존귀(尊貴)라는 것은 덕(德)으로 인정되었지 지위로 인정되지 않았거니 당신들은 무엇으로 능히 스스로 귀(貴)해지겠는가?』하시니 좌석 안이 점점 긴장된 가운데 서로돌아 보며 얼굴빛을 바꾸고 누구도 감히 힐난(詰難)하지 못하였다.

어떤 수령이 백성들에게 조세 수백 석을 거두어 들이고 또 다시 거두려 하디 따르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거짓으로 차대장(借대狀)을 만들고 문서가 이루어짐에 두루 서명을 받으니 고을이 감히 반대하지 못하였고 이에 공이 서명받는 사람의 등에 「장간회도(長姦誨盜)」라는 넉 자를 크게 써서 종을 재촉하여 돌아가 수령에게 보고하게 하니 수령이 보고 그게 저상하여 일이 마침내 행해지지 못하였다, 일찍이 동래항(東萊港)을 유람하실 때 왜장(倭將)과 더불어 임진난때의 일을 논하다가 공이 시를 지어 이르시기를「임진난에 군사를 희롱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던가? 서로 만나자 노한 기운 뒤엉키었네 그때 피 묻히지 못한 한을 어찌 참으리?칼집을 돌아보니 용천검(龍泉劍)이 울부짖네.」라고 하시니 왜장이 「그대는 강개한 뜻을 과시하지 마오 한(漢)나라의 봉하는 다시 감천(甘泉)을 비추지 않으리니」라는 구절로 회답하였었다. 그 후에 조엄(趙儼)이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가서 한곳에 이르니 정문(旌門)에 쓰였으되 「조선 열사 하 석징의 거리(朝鮮烈士 河11碩徵之閭)이라 하였기에 물어보니 어찌 되었던고 하니 공이 이 시로 정려를 얻으셨고 왜장은 비사굴기(卑辭屈己)로 벌을 받았더란다, 하 응한(應漢)이란 사람은 옛날 창녕 고을의 관리였는데 그 때 돌아와 그 일을 말하였으므로 지금까지도 창녕 사람들은 기이한 이야기로 삼고 있다.

공은 과거 공부를 일삼지 않으시고 이름난 산수(山水)와 옛 사람들의 유적지를 유람하기를 좋아하여 서쪽으로 구월산과 묘향산에 올라 기자(箕子)의 유허지를 역방하셨고 동쪽으로 태백산 금강산과 관동의 명승지를 찾으셨으며 남쪽으론 지리산과 금산(錦山)과 노량(露梁)의 경지를 모두 구경하여 그 기백을 소탕(疏蕩) 하게 하셨다. 진작 또 전국의 모든 명석(名碩)들을 찾아보셨는데 이 밀암(李密菴)과 눌은(訥隱)과 식산(息山)과 권 창설(權蒼雪)과 황 용강(黃龍岡)드이 모두 기사(奇士)로 대우하였었다. 고 말로 일러 그 과격함을 제재하고 대도(大道)로 가도록 하였으나 그러나 공은 또한 더욱 영락(영落)하셨다. 고향에 돌아가셔서는 한채의 집을 지어 화왕산(火王山)을 바라보게 하시고는 「경곽(景郭)」이라 이름하셨는데 이는 충익공 곽 재우(郭再佑)의 풍범(風範)을 사모하심이라 한다. 또 일찍이 지동정(池棟亭)에 임시로 거하시면서 어부정(漁父亭)을 중수하여 운수(雲水)사이에서 읊고 노니시어 자적(自適)하시었다. 무신년의 변란에는 힘써 탄식하여 말씀하시되 「우리 집안은 대대로 충훈으로 드러났는데 지금 나의 실오라기 같은 명이 오히려 있거늘 능히 의로써 분발하지 못하고 마침내 방안에서 죽어 가겠는가?」하셨다. 공이 임자(1552)년에 탄생하시어 갑자(1624)년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73세였다. 마연산 손자에 장사되셨다,

진양 하씨는 중조(中조)휘 즙(楫)이 진천 부원군에 봉해지신 이후로 대대로 현달하였다, 고조님 휘는 준의(준義)인데 임진난에 공신이 되어 참의에 증직되셨고 증조님 휘는 숙(潚)이요 벼슬은 동지 중추인데 역시 이름이 창의록에 실려 있다. 조부님 휘는 자렴(自濂)이요, 황고님 휘는 진맹(晋孟)이요, 선비는 현풍 곽씨 익(翊)의 따님이시다. 완산 이씨 운의 따님에게 장가드셨으나 소생이 없어 종형 성징(聖徵)의 아드님 응제(應濟)를 양자로 삼으셨다. 손자님은 필호(必浩), 필담(必淡), 필종(必宗)이다.
공께서 부모 섬김에 효도하여 혼정신성(昏定晨省)과 봉양을 은혜와 예로써 하셨으며, 3년 동안의 상중에는 질대를 벗지 않으시고 내당(內堂)에 들지 않으셨으며, 날마다 사당을 배알하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성묘함을 날씨의 춥고 더움으로 폐하지 않으셨다. 실전(失傳)한 선대의 묘소 여러 곳을 찾아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종족애(宗族愛)를 두텁게 하셨으며 향약을 수명(修明)하셨기, 사람들이 많이 감화하여 스스로 묘에 참배하는 이가 있게 되었다.

아, 옛날 뜻은 크고 행동은 이상했던 증석(曾晳)과 엄 자릉(嚴子陵)이 모두 미쳤다는 이름을 얻었음이 당연하도다. 공은 마음이 굳세고 자신을 높이어, 도탄에 빠진 유속(流俗)에서 바야흐로 종이 교만한 객(客)을 꾸짖고 개가 부정한 관리를 내어 쫓음 직한 일에 울분이 산같이 치솟았었다. 그 웃고 성냄은 족히 동정할 것이 못되나, 그러나 조리 있게 명교(名敎)를 인용하여 세상을 면려(勉勵)하셨으니, 저 남의 초상에 노래부르고 황제(皇帝)의 배 위에 발을 얹은 사람과 견줄 때 어떠한고? 어진 선비를 친히 하고 법도대로 나아가며 몸소 실천하여 사물에 법도 되었음이 또한 거의 중행(中行)에 해당하지 않겠는가? 그 이름을 숭상하여 명목을 삼노라. 이에 명(銘)을 쓴다.

복을 쳐서 귀머거리를 일깨우고 얼음 같은 깨끗함으로 흙탕물에 사셨네.

사나운 말에게 자갈을 물린다면 어찌 천 리의 먼 길이 어려우리?

저 잘난 체하는 자들은 어찌 빨리 죽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