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재공(志齋公) 하손(河遜)20세손

낭주(郎州)의 선비 하헌배(憲培), 하행래(幸來) 두 사람이 나를 중봉산방으로 찾아와 그의 중세조(中世祖) 지재(志齋)공의 묘비문을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께서 명가(名家)의 후예로 태어나 불운한 때를 만나 타향으로 이사하여 문호(門戶)를 세우셨으니, 마땅히 모범된 행적이 후세에 없어지지 말았어야 할 것인데 기송사(奇松沙)공이 일찍이 행장을 지었으나 원고가 중간에 타 버렸으며, 10세손 휘 정원(正源)이 묘비를 세웠으나 비가 너무 작아 세계(世系)의 원류(源流)만이 실려 있을 따름이어서 이에 우리 선조의 행적이 적막하게 되어 전해지지 않으니, 자손들의 한스러움이 되지 않겠소? 지금 비를 고쳐 세우려 하니, 당신은 한마디의 말로 아름다운 혜택을 베풀기 바라오」하므로, 내가 그 정상을 민망히 여겨 위로하여 말하기를 「자손이 조상의 비를 만듦에 세계(世系)를 상세히 하고 사적을 간략하게 함은 사사로이 치우쳐 잘못됨이 있을까를 두려워하여 그리 함이니, 무슨 슬퍼할 것이 있겠는고? 공의 행적이 전해짐직하지 않았었으면 기송사 공이 행장을 짓지 않았을 것인데 이미 행장을 지었으니, 불행히 타 버렸다 하지만 행장을 지을 만한 실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니 무슨 슬퍼할 것이 있으리요?」하였다. 두 사람이 역시 그렇다 하므로, 내가 이어서 사양하여 말하기를 「그렇다면, 비록 나같은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공을 위하여 글을 쓰게 하면 도리어 옛 비의 간략함과 기송사공의 잃어진 글이 사람에게 믿음직함보다 못하리라」하니 두 분이 그렇지 않다 하고 더욱 굳이 청하므로 내가 끝내 사양하지 못하여 붓을 적시노라.

공의 휘는 손(遜)이요, 호는 지재(志齋)요, 성은 하씨며 관향은 진주이니, 고려 사직 휘 진(珍)이 시조이시다. 휘 즙(楫)은 호가 목옹(木翁)과 더불어 도덕과 명절(名節)로 진주 경덕사(慶德祠)에 배향되셨다. 휘 금(襟)은 조상의 음덕으로 벼슬을 받으셨으나 벼슬할 뜻이 없어 호남 세장(世庄)으로 물러나 도학을 강명(講明)하시니, 세조(世祖)가 그 뜻을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공조참의에 승직시켰는데, 이 분이 공의 7대 조부이시다. 고조의 휘는 기남(起南)인데 장사랑이요, 증조의 휘는 관(灌)인데 통덕랑이다. 조부 휘 홍수(弘秀)는 증이조참판인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적에 항거하셨다.

황고의 휘는 응문(應文)인데, 오위도총부 부장으로 임진난 때 원종공신에 책훈되셨다. 선비는 밀양박씨이니, 화수(和洙)의 따님이다.공이 난리가 일어난 때에 태어나 사시던 곳이 일정하지 못하여, 해남으로부터 영암군 서쪽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면서부터 자손들이 그 곳에 살게 되었거니와, 돌아가심이 군(郡)의 서쪽 재경동 간좌에 장사되셨다. 배위는 밀양 박씨인데, 묘는 합봉이다. 아드님 한 분을 두었는데 백소(白素)이며 진주 강씨에게 장가드셨다. 손자는 봉수(鳳壽)인데 낭주 최씨에게 장가드셨다. 증손, 현손 이하는 번성하여 기록하지 못한다.

아! 나라와 가정의 대소를 막론하고 창업하여 수통(垂統)한 선조가 된 분에겐 그 어려움이 두 가지이다. 고심(苦心)하지 않으면 창업할 수 없고, 덕을 쌓지 않으면 수통(垂統)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사람마다 쉽게 논하겠는가? 내 공의 행장을 읽어 보지 않더라도 고심하고 덕 쌓음이 남이 미치지 못할 바였음을 알겠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