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헌공(一軒公)하해관(河海寬) 19세손

墓誌銘

하씨는 대벌(大閥)인데 원정공 진천부원군 휘 즙(楫)이 중세조(中世祖)이시다 조선조에 이르러 대사간 결(潔)이 계셨으니 문효공 연(演)의 아우님이시다 그 6세손에 집의 태계선생(台溪先生) 휘 진(진)이 계시어 문학과 충직으로 드러나셨다. 이 분이 서산 정씨(瑞山鄭氏) 부호군 임룡(임龍)의 따님과 혼인하여 1634년 5월2일에 공을 진주 성태리(省台里)에서 낳으셨다.공의 휘는 해관(海寬)이요 자는 한경(漢卿)인데 미목(眉目)이 청수하고 총명이 뛰어나서 겨우 어머님 품속을 면했을 때 선친께서 벽에 글자 100여 자를 써서 가르치니 공이 입으로 말을 못하나 손으로 짚으심에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무슨 글자가 제일 좋은고?」하니 「부모(父母)」두 글자를 가리키셨다.

여섯 살에 통감절요(通鑑節要)를 읽으면서 말하기를「가의(賈誼)는 국량(局量)은 작고 재주가 억세어 동강도(董江都)의 학문이 넓고 바름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셨다. 열세 살에 의령의 미수(眉수) 문정공 허선생을 찾아 대학(大學) , 중용(中庸)을 배우셨는데 즐겨 힘을 다해 공부하니 문정공이 손수 사무사(思無邪)무불경(毋不敬)의 여섯 자를 전서(篆書)로 써서 주셨다 장성하여서는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님을 섬겨 뜻과 몸을 아울러 봉양하였다. 꾸짖는 소리가 개와 말에도 미치지 않았다. 어머님이 병환이 위독할 때 공이 목욕 재계하고 북극성에 빌며 자신의 몸으로 대신해 줄 것을 원하였다. 어머님이 조금 우선하실 때 꿩고기가 생각난다 하였더니 아침에 꿩이 스스로 부엌으로 들어왔으므로 잡아 드리니 마을에서 감탄 하였다.

1658년에 아버님 병환이 위독할 때 공이 마음을 태워 뼈만 남았는데도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리려 하였는데 아버님이 간절히 말렸으므로 공이 울면서 그만두었다. 상(喪)을 당하여서는 시묘살이를 하면서 죽만들며 3년을 슬피우시니 산 아래 사는 사람들이 감읍(感泣)하여 차례로 밤에 숙직하였고 상복을 벗은뒤 남이 말하는 중에 선친의 일에 미치면 문득 눈물을 흘려 오열하니 남도 차마 말하지 못하였다 1673년에 연상(蓮上)으로 가서 허선생을 뵈니 허선생이 손수 사물잠(四勿箴)과 주일명(主一銘) 및「천지는 사물을 낳는 것을 덕으로 삼고 성인은 사물을 이롭게 하는 것을 마음으로 삼는다」는 글귀를 써서 권면하였다

1683년 어머님이 돌아가시매 또 시묘살이를 하였다. 1686년에 상복을 벗은 뒤 세상사를 사절하고 생도들을 가르치며 그 집을 이름하여「일(一)」이라 하고 항상 보는 바로 삼으셨다. 삭망(朔望)에는 반드시 성묘하여 곡읍(哭泣)하였다 점차 실명(失明)하시더니 9월21일 임종 하실 때 시를 지어 이르기를「충효의 처음 마음을 끝내 시험 하지 못하여 이승이나 저승 이나 내 행적을 녁녁히 한 곳 없네」하셨다. 11월에 구둔담 간좌(艮坐)에 장사되셨다. 처음 배위는 진양강씨(晉陽姜氏)인데 해(海)의 따님이요 사위는 세 분인데 강겸후(姜謙厚) 김태명(金泰鳴) 강만주(姜晩周)이다 후배(後配) 옥산 장씨(玉山張氏)는 진(鎭)의 따님인데 아드님 한 분을 두셨으니 주(柱)요 두 사위는 강시주(姜時周) 이덕승(李德升)이다 주(柱)는 4남을 다셨으니 덕휘(德徽) 후로 출계하였고 차남은 서룡(瑞龍)이다 덕원(德遠)의 네 아드님은 필룡(必龍) 치룡(致龍) 우룡(禹龍) 기룡(紀龍)인데 기룡(紀龍)은 덕부(德溥)의 후로 출계하였다. 나머지는 번성하여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공이 항상 배우러 오는 이에게 말씀하기를「우리 집안의 지결(旨訣)은 경의(敬義)일 따름이다」하시고 자제들을 훈계하여 말씀하기를「선인들이 충효로써 가법(家法)을 전하셨으니 너희들은 이것을 염두에 두라」고하셨다. 고을 사람들이 그 효성을 임금에게 아리려 할새 꾸짖어 그만두게 하였다 시문이 많았으나 흩어져 수록되지 못하고 약간이 남아서 옛날 강고(江皐)유심춘(柳尋春)이 서문을 쓰고 징군(徵君) 곽종석(郭鐘錫)이 발문(跋文)을 써서 간행하였다. 공의 7세손 한철(漢澈)이 아들 경락(經洛)을 시켜 나에게 비문을 청하매 이에 명한다

천고의 심학(心學)은 공경 경(敬)자를 주장으로 삼았는 바

공의 평생에 제일로 삼으신 것은 한결 같은 효도였다.

살아서는 일헌당(一軒堂)이 있었고

돌아가셔서는 비석에 새김있어 이 주일(主一)을 증거하도다

 

 일헌공(一軒公)

조선 중기 대학자이자 남인(南人)의 영수였던 미수 허목(許穆)이 의령에 머문 적이 있다. 경기도 연천이 고향인 미수가 병자호란으로 말미암아 의령으로 피란 내려온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의령에 내려온 것이다. 미수는 현재 의령군 대의면 소재지에서 6㎞쯤 떨어진 중촌 마을에 4년간 머물면서 인근 지역에 사는 많은 선비들을 가르쳤다. 일헌(一軒) 하해관(河海寬)도 미수가 의령에 있을 때 찾아가서 배운 선비이다. 미수가 써준 ‘주일명(主一銘)’을 평생 교훈으로 간직하고자 호를 ‘일헌’이라고 지었다. 그가 호를 ‘일헌’으로 지은 것은 공경스런 마음을 평생 간직하면서,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 오로지 성현의 도를 따르고자 하는 한결같은 마음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헌은 남명 선생의 학문을 평생 사숙한 태계 하진의 셋째 아들이다. 태계는 사간원 정언으로 재직하면서 인조반정 공신 김자점 악행을 상소한 강직한 선비이다. 일헌은 1634년 진주 북쪽 성태동에서 태어났다. 성태동(省台洞)은 지금 명석면 관지리로 지금도 진양 하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고려 사직(司直)을 지낸 하진(河珍)의 후예들인 이곳 하씨들은 이곳에 정착해 지금까지 400년을 살고 있다. 일헌은 타고난 자질이 준수했다. 겨우 걸음걸이를 할 나이쯤 되었을 때, 부친이 벽에 글자 백 여자를 걸어놓고 가르치면서 글자를 물어보면 한자도 모르는 글자가 없었다고 한다. 하루는 봉강 조겸이라는 선비가 집에 찾아와 이를 보고 기특하게 여겨 묻기를 “이 글자들 중 어느 글자가 가장 좋으냐”라고 했다. 이때 일헌은 부(父)자와 모(母)자를 가리켰다고 한다. 봉강이 이를 보고 총명함이 하늘에서 타고난 것 같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6, 7세 때 통감을 읽으면서 “가의(賈誼)는 국량이 적어 동중서(董仲舒)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면서 중국의 역사 인물을 평가하기도 해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3세 때 부친의 명으로 의령에 내려와 있던 미수 허목에게 가서 글을 배웠다. 대학 중용 등 사서를 수업할 때, 미수는 성현의 도를 말할 만하다고 여겨 ‘사무사(思無邪) 무불경(毋不敬)’ 6자를 손수 써주면서 성현이 되는 요점이 여기에 있다고 했다. 일헌을 이를 가슴깊이 새겨 평생의 교훈으로 삼았다. 사무사(思無邪)는 생각을 하는데 사악함이 없어야 된다는 뜻으로, 사람이 생각이 바르면 모든 일이 잘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불경(毋不敬)은 소학에 나오는 말로 “모든 것을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미수는 제자인 일헌에게 생각을 바르게 하고 모든 것을 조심하면 성현의 도를 실천할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15세 때 부친을 모시고 연천에 미수를 만나러 갔는데, 이 때 한 재상이 일헌의 자질이 남다른 것을 알고 사위로 삼고자 했다. 부친 태계는 그 재상의 권세가 너무 높아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20세 이후에는 겸재 하홍도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했다. 일헌은 겸재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면서 남명의 학문 요지를 전수 받았다. 오직 부모를 공경히 모시면서 독서하는 것을 임무로 삼고, 사람이 혹 벼슬을 권해도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일헌은 효성이 뛰어난 선비였다. 모친이 병이 들자 자기 몸으로 대신하기를 하늘에 빌었으며, 부친이 몸이 불편하여도 이와 같이 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자신의 몸이 상할 정도로 3년 상을 극진한 예로써 치렀다. 일헌의 효성을 곁에서 본 마을 사람들은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하면서 조정에 표창을 올리기도 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40세때 연천으로 미수를 찾아가 부친 태계의 묘도문(墓道文)을 청했다. 미수는 일헌에게 묘도문과 함께 사물잠(四勿箴)과 주일명(主一銘)을 써 주면서 경계를 삼도록 했다. 뒤에 또 ‘천지(天地)는 생물(生物)로 덕을 삼고 성인(聖人)은 이물(利物)로 마음 삼는다’ 는 글도 써 주었다.

1683년 부친의 문집인 태계집(台溪集)을 간행하고, 이해에 모친이 별세하자 세상일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일헌은 후진들에게 “우리 학문의 종지는 경의(敬義)뿐”이라고 늘 강조하고, 정주학(程朱學)을 스승으로 삼아 자손들에게 충효를 전수했다. 그리고 1686년 세상을 떠나니 향년 53세였다.일헌공의 묘비에는 “아무리 뛰어난 천리마라도 말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일반 말들과 같이 보통 마굿간에서 일생을 마친다”며 사람도 이와 같으니, 일헌공도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도 좋은 시대를 만나지 못해 평생 자연을 벗삼아 보낼 수 밖에 없었음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을 기록하고 있었다. 일헌은 1634년 진주 북쪽 성태동에서 태어났다. 성태동(省台洞)은 지금 명석면 관지리로 지금도 진양 하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