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무원종공신 하응문(河應文)19세손


공의 휘는 응문(應文)이요 자는 사중(士仲)으로 참판공의 맏아들이다. 진양하씨는 고려 사직(司直) 휘 진(珍)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문학과 관직이 끊어진 시대가 없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사간원대사간 휘 결(潔), 공조참의 휘 금(襟), 첨지중추부사 휘 순(淳), 성균진사 휘 경연(景沇), 장사랑 휘 기남(起南), 통덕랑 휘 관(灌) 같은 분들이 공의 조부로부터 그 윗대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풍도가 보통사람과 달라 마치 군계일학(群鷄一鶴)과 같았다.

또,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비록 나물이나 과일 같은 별난 음식이 아니라도 감히 먼저 입에 넣지 않았고, 혹 부모님이 내려 주시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간직해 두었다가 다 떨어질 때를 기다려 내놓았다. 부모님이 거처가 추운지 따뜻한지를 집안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살폈다. 형제간에는 우애있게 지냈는데 비록 풍속에 따라 세간을 나가 살았지만 부인들의 말로 말미암아 사이가 나빠지는 일이 없었다. 일가 친척과 친구들과도 모두 신의 지키며 서로 믿고 살았다.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는데 틈이 있으면 병서를 즐겨 읽었으니 아마도 일찍이 변방에 왜적의 침략이 닥칠 줄 았았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분연히 일어나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죽을 뜻을 갖고 있었다. 동지들과 더불어 의주로 임금님의 피난 수레를 호종하러 가려고 했으나 길이 막혀 따라가지 못했다.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에서 왜적을 무찔렀는데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왜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등창병이 나서 집에 있게 되자 본래 품었던 뜻을 펴지 못하게 된 것을 깊히 개탄하였다.

공신록권이 내려오자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선조임금이 승하하자 제단을 쌓고 대궐을 향하여 곡하였다. 왜침이 있기전에 미리 대비하지 못하여 임금이 피난하게 한 것을 늘 한스럽게 여겼다.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보고는 다시 정치에 나갈 뜻을 가지지 않았다. 72세에 돌아가시어 해남군 월암리 묘좌(卯坐)에 장사되었으니 아버지 산소가 있는 곳이다. 배위는 의인(宜人) 밀양박씨인데 화주(和珠)의 따님이고 묘는 합장하였다. 공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는 손(遜)이고, 다음은 통덕랑 우인(友仁)이다. 손의 아들은 백소(白素)이고, 우인(友仁)의 아들은 진화(眞華)이다.

아! 지금 새로 내는 도로공사로 인하여 공의 산소를 영암군 서면 재경동 간좌(艮坐)에 이장한다. 대한제국이 망한 뒤 1914년에 후손 태주(泰疇), 권용(權庸), 권규(權奎), 권황(權煌), 권엽(權燁), 유욱(有煜)등이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지은 묘갈명을 세웠는데 1950년 6.25 동란 때 총탄에 맏아 파괴되어 이제 다시 세우며 이에 명(銘)한다.

나라가 글만 숭상하여 진약해지는 것이 그 병폐이다.

공이야 본래 선비인데도 말타고 활쏘기 익혔다네.

왜적 때문에 북으로 몽진하니 변경은 난리로 어지러웠네.

공은 병서를 읽었으니 진실로 길이 강개했었지.

임진년의 그 난리 때문에 임금은 북쪽으로 파천했다네.

공이 호종하려고 했건만 길이 막히고 또 멀었다네.

등창으로 집에서 지낼 적에 정치 어지러워 숨어 있었네.

해남고을의 월암땅에다 처음에 산소를 들였다네.

언덕과 골짜기 뒤 바뀌게 되어 훌륭한 후손들이 두려웠네.

이제 새 산소를 잡았으니 영암고을 간좌 언덕이라네.

나지막한 옛날 비석일랑 난리 겪어 글자 망가졌네.

이에 큰 비석 다듬어서 명을 새겨 길이 전한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