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공(瑞石公) 하갑산(河甲山)선조님 묘소 : 전남 화순군 남면 삼거리

서석공(瑞石公) 하갑산(河甲山)19세손

공의 휘는 갑산(甲山)이요 자는 태산(太山)이며 호는 서석(瑞石)이시다. 성은 하씨요 관향은 진주 이며 유서 깊은 삼하사족으로 고려 때 이르러 사직을 지내신 휘 진(珍)이 시조이시다. 대대로 명벌이 높았으며 9세조 휘는 즙(楫)이고 진천부원군에 봉하셨으며 시호는 원정공이시다 그의 아드님의 휘는 윤원(允源)이며 호는 고헌이고 진산부원군에 봉해지셨다. 그의 아드님 휘는 자종(自宗)이며 호는 목옹이시고 병부상서를 지내셨고 국망에 불사이군(不事二君)하였으며 두문동(杜門洞) 72유현으로써 명성이 높았으며 조선조 초에 의정부좡의정에 증직되셨다. 그의 아드님 오형제 중 넷째 아드님 휘 결(潔)은 사관원 대사간에 이르렀고 세종 때의 명상이신 휘 연(演) 문효공의 아우님이시며 세조의 왕위 찬탈(纂奪)에 지금의 정읍에 낙향 은둔(隱遁)하셨으니 공의 7대조이시다.

공은 휘 윤세(潤世)의 아드님으로 명종 갑인 1554년 정읍에서 출생하셨으며 선조(宣祖) 기묘 1579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첨정(僉正)이 되셨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향리(鄕里)에 은둔(隱遁)하였다 공은 나면서부터 보통사람과 달리 용자(容姿)가 매우 위엄이 있으셨다. 임진왜란 당시 대가(大駕)가 의주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백의의 몸으로 위병을 모집하여 장사500여인을 인솔하여 의주로 바삐 가는 중에 이때 금산 전투에서 제봉(霽峰) 중봉(重峰)을 비롯하여 700여 의사가 순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여 이르기를「호남은 국가의 근본인데 만일 호남이 적의 소굴(巢窟)로 변한다면 사직(社稷)이 위태하리라」하고 금산으로 진격하여 적30여 급을 참살하고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포위되어 탈출할 가망이 없게 되자 공은크게 부르짖기를「나 죽는 것은 한이 없으나 국가를 회복치 못하고 죽는 것이 한이다」하시고 돌격 순절(殉節)하셨으며 후일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셨다. 공의 아드님은 휘 기남(起南) 휘 술남(述南) 휘 계남(啓男)이신데 공의 유상(遺像)을 방에 모시고밖에 나갈 때나 들어올 때 고하였으며 홀로 계신 어머님에 대한 효성의 지극함이 하늘이 내신 효자라고 동복(同福)고을 읍지(邑誌)에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