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암(汪庵) 하진명(河晋明)19세손

공의 휘는 진명(晋明)이요 자는 빈숙(彬叔)이요 호는 왕암(汪庵)이다. 공은 1619년에 합천 야로 돈평에서 태어나셨다. 진양하씨는 고려 사직 휘 진(珍)을 시조로 하여 이로부터 8대를 내려와 송헌공(松軒公) 휘 즙(楫)은 진천부원군(晋川府院君)에 봉해지고 원정공(元正公) 시호를 받으셨다. 그 아드님 목옹공(木翁公) 휘 자종(自宗)은 병조판서였는데 고려가 멸망함에 신하로서의 절의(節義)를 지키셨다. 목옹공의 아드님 휘 연(演)은 자가 연량(淵亮)이요 호는 경재(敬齋)로 영의정이었는데 문효공(文孝公) 시호를 받고 문종묘(文宗廟)에 배향되셨다. 문효공의 현손 증좌승지공 휘 천수(千壽)는 호가 성재(惺齋)요 정릉참봉(定陵參奉)이었는데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로 증직되셨고, 그 아드님 증좌승지공 휘 혼(渾)은 자가 성원(性源)이요 호는 모헌(暮軒)인데 익위사세마 및 장수찰방을 지냈고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으로 증직되셨다. 모헌공은 남명 조식(南冥曺植) 선생의 문하로 제현들과 교유하였으며 우리 하씨의 만력보(萬曆譜)를 편찬할, 봉선록(奉先錄)과 가의(家儀)를 지으셨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전공이 많으셨다.

모헌공은 6남 1녀를 두셨는데 차남인 통덕랑 경량(景量)은 자가 자대(子大)인데 1576년에 태어나 효우 돈목하여 고을에서 칭찬이 자자했다. 통덕랑공은 3남 2녀를 두셨는데 아드님은 휘 진문(晋文), 진장(晋章), 진명(晋明)이요, 사위는 이탑, 문재주(文載周)이다. 셋째 아드님 휘 진명(晋明)은 어릴 때부터 공부에 힘쓰고 효도가 극진하였는데 아버님 병환중에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치료에 정성을 다하였으나 1632년 8월 20일에 세상을 뜨시니 향년 56세였다. 슬픔과 애통이 컸으며 두 분 형님과 함께 법도에 따라 장례를 치르고, 묵촌 뒤 자경산 무시랑 조고 묘 아래쪽 신좌(辛坐)에 장사하였다. 공은 서산정씨(瑞山鄭氏)와 혼인 하였는데 그 아버지는 선무랑 흡이요, 조부는 금월헌 인함(琴月軒仁涵)이요, 재종조는 내암 인홍(來庵仁弘)이요, 증조는 승지 건(健)의 后이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부덕을 지니셨으며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드님은 휘 필연(必衍), 필원(必遠)이요, 사위는 김성도(金聖道)이다. 손자는 휘 세기(世杞), 세권(世權), 세경(世經), 세위(世緯), 세장(世章)이고 증손이하는 많으므로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 조부 모헌공은 남명 조식, 내암 정인홍 선생의 문하였는데 당시는 당과 학파간에 논쟁이 심하여 정정(政情)이 혼탁할 때였는데 그때의 연고로 왕암공 형제가 이별하여 큰 형님 진문은 진양군 진성면 가좌리 월아산 밑으로 이사하여 은신하고 근심하며 타관살이에 병을 얻어 1670년에 향년 51세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나셨다. 유언에 따라 야로 미숭산 아래 윗터 선달동 자좌(子坐)에 장사되었다. 배위 서산정씨는 1622년에 태어나서 1674년에 돌아가셨으며 묘는 쌍봉으로 장사되었다. 손자 이하는 많으므로 기록하지 않으며 후손은 이백여 호이다.
1785년 봄에 공의 후손 영진(永珍), 영성(永星), 영세(永世)가 나를 찾아와서 묘비문을 청하는데 나의 외가 일이라 정의상 거절할 수 없는 일이라 천학(淺學)이나 삼가 이와같이 쓴다.
1997년 청명절에 인천 이상록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