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은공(漁隱公) 하응회(河應會)19세손

공의 휘는 응회(應會)요 자는 응백(應伯)이며 호는 어은(漁隱)인데 1574년에 태어났다 공은 어릴 적부터 천성에서 우러난 지극한 행적을 지닌 데다 총명함이 뛰어났고 종형 영무성공(寧無成公)에게서 수학하고 최수우(崔守愚) 하각재(河覺齋) 정한강(鄭寒岡) 선생들에게서 훈도(薰陶)받았으니 사우(師友) 연원(淵源)이 바른 것은 그 유래가 있었다.불행히도 임진왜란을 당하여 어버님 통덕공(通德公)이 의령에서 순국하시매 공이 어린 나이로 참변을 당하여 피눈물을 쏟아 거의 효를 상하게 할 지경에 이르시니 어머님 말씀을 어기지 아니 하였다.어머님을 모시고 석천(石川)의 산장으로 들어갔었는데 선령(先靈)이 꿈에 나타나므로 밤중애 놀라 일어나서 모자가 붙잡고 겨우 몇걸음 피해 나오니 바위가 무너져 움막이 부서졌다. 길에서 노동(老東) 최흘(崔屹)을 만나 함께 풍기의 수촌(樹村)으로 갔는데 비록 피난하는 중이었으나 경적(經籍)을 찾아 강독을 중단하지 않으니 최흘도 아들에게 명하여 따라 배우게 하였다 난리가 평정되자 어머님을 모시고 의령으로 돌아갔다1597년에 어머님 정 부인이 돌아가셨으므로 선고(先考)의 묘에 합장하고 여묘살이를 하면서 법제를 지켰는데 한 쌍의 까마귀가 묘 옆에 깃들어 여러 달 동안 다른 데로 가지 않았다

1601년에 군자감 참봉에 제수되고 또 천거로 예조좌랑의 품계를 받았으며 이모촌(李茅村) 하창주(河滄洲) 등 제현들과 덕천서원(德川書院)을 중수하여 조 남명 선생을 봉안하고 또 모든 일가들과 더불어 족보를 수명(修明)하였으며 영무성공을 따라 매봉 아래 정사(亭舍)를 지어 이름을 어은(漁隱)이라 하고 존덕성(尊德性)경재 팔괘도(敬齋八卦圖)를 써서 벽에 붙히고 자경잠(自警箴)을 지어 그 아래에 붙여 항상 보고 수용(受用)하는 자료로 삼았다. 1634년에 봉정대부 예조좌랑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41년에 병환으로 눕게 되어 문생들에게 명하여 초은공(樵隱公)이하 3대의 유문(遺文)을 편찬케 하여 보관하고 1643년 정월 28일에 돌아가셨다. 8일 뒤에 통정대부 직첩이 이르렀는데 향년이 70세였다. 4월 8일에 응봉(鷹峰)아래 인곡(仁谷)의 신좌에 묻히셨다 진주강씨(姜氏)는 참봉 구정(九鼎)의 따님인데 공의 묘에 합장되었다. 공의 천품이 도(道)에 가까웠고 어진 사우(師友)들에게서 공부하여서 어려운 때를 당하여서도 실행하는 바탕이 뿌리가 있고 곧았다 상중에는 슬픔을 다하고 봉양함에는 기쁨을 다하였으며 여력으로 면학하여 어려움 속에서도 옥(玉)을 이루었으니 이는 주역에 이른 바「곤궁하되 누릴 바를 잃지 않는 이는 군자 뿐인져!」함이라 이제 왜란을 두 번이나 겪어 문헌이 날로 없어지므로 공의 후손 희도(羲圖) 겸제(兼濟)가 묘비를 세우기로 계획하여 문중 젊은이 재명(在明)과 정호(貞浩)에게 가장(家狀)한 통을 보내어 먼 곳 의 나에게 비문을 요구하매 살펴보고 감탄하여 대략을 적고 명(銘)한다

인(仁)이 비록 지성(至性)이나 늙은 벌(벌)이 빛을 더하고

추운 겨울 지난 괴로운 절개는 그 씩씩함을 넉넉하게 하네

선고께서 꿈 속에 바위 무넘짐을 알리셨고

애성(哀誠)에는 사물도 감동하여 한 쌍의 까마귀가 무덤에 깃들었네

근본이 서고 도가 나서 대현(大賢)에게서 수련하시고

구원(丘園)에서 높이 지내시어 이름과 실행이 함께 따랐네,

선천(先天)의 심획(心획)이 한천(寒泉)에 잠들어

아 응봉 언덕의 엄연한 무덤에 비석 세워

자취를 기록하노니 길이 후인에게 전함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