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공(參議公) 하준의(河遵義)18세손
 

하씨의 선조가 진양에서 비롯된 이래 고려 때에 휘 즙 시호 원정이 진천 부원군에 봉해지셨고, 원정공이 휘 윤원을 낳으신 바, 호가 고헌(苦軒)인데, 진산 부원군에 봉해지셨다. 휘 계종은 군사요, 휘 척은 현감이요, 휘 맹질은 청백리이니 : 모두 이름난 선조이시다. 고조님은 주인데 세자 우시직이요, 증조님은 구수인데 현감이요, 조부님은 관인데 별제요, 황고는 현인데 충순위요, 선비는 김해 허씨인데 진사 흠의 따님이시다.

공의 휘는 준의요, 자는 의숙이니 : 옥계는 그의 호이다. 명종 임자(1552)년에 나서 선조 병신(1596)년에 돌아가시니 : 향년이 45세였다. 묘는 창녕 서쪽 용배산 손좌(巽坐)에 있다. 공은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고 강개(慷慨)한 큰 뜻이 있어 일찍이 스스로 말하시되, 「선비는 천하의 걱정은 먼저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뒤로 하여 즐기며 염치를 독려하고 절의를 숭상하되 부귀빈천(富貴貧賤)으로 그 뜻이 움직여서는 안 된다.」라고 하셨다. 천성이 순효(純孝)로와 부모 옆에 있을 때는 얼굴빛을 반드시 화평하게 하며 음식은 반드시 먼저 맛보아 빈틈없이 하였다. 경진(1580)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슬퍼하여 거의 멸성(滅性)한 데 이르렀고, 3년을 마치도록 질대(상주의 의장)를 벗지 않았으며 상중에도 찬수(饌羞)를 몸소 올려 남이 대신 하지 못하게 하셨다.

상기(喪期)를 마침내 날마다 사우(師友)들과 노닐어 견문(見聞)이 더욱 넓어졌으므로, 그 때 한강(寒岡) 정 선생이 이 고을 원으로 부임하여 공의 어짊을 듣고 몸소 찾아가서 강토(講討)하고는 크게 칭송하였다. 신묘(1591)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슬퍼하기를 부친상 때와 같이 하셨고 이듬해에 왜란이 크게 일어났으므로 공이 오배산 선산 아래에 피난하여 틈을 타서 모친 산소를 살피고 울기를 그만두지 않으시니, 뒷사람들이 여막을 가리켜 효자막(孝子幕)이라 하였다. 계사(1593)년에 서천(西川) 정 곤수(鄭崑壽)가 공의 통재(通才)를 조정에 천거하여, 곧 수문장(守門將)으로 제수하니, 공이 말하기를 「일에 어려움을 사양하지 않음은 인신(人臣)의 도리다.」하시고 곧 벼슬에 나아가 왕을 모시고 의주(義州)에 이르러 시를 지어 이르시되, 「고향 하늘은 천 리에 막히고 나라의 걱정은 한 마음에 스미네. 남은 일은 내 손의 칼로 기필코 적장의 목을 베는 일이라.」하셨으니, 그 충분(忠憤)에서 우러나온 마음이 사람을 늠연(凜然)하게 하는 바이거니와, 드디어 홀로 앞을 가로막아 적을 벰이 매우 많았다.

환도(還都)한 뒤에 이등공신에 녹훈되어 조정에서는 장차 크게 쓰일 인물이라 하였는데, 공이 오랫동안 군중(軍中)에서 고생하여 피로가 쌓여 병이 되었으므로 왕에게 물러날 것을 청하신 바, 왕이 명하여 약을 주게 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 이것은 두터운 은전이었다. 또 시를 지어 이르되, 「하늘이 높으니 남쪽으로 은혜가 뻗쳤고, 별이 밝으니 북쪽으로 정성을 받드네. 춘추(春秋 : 공자가 편찬한 역사책)의 글을 읽어 죽어도 마음을 바꾸지 않으리라.」하시고 아들 숙(潚)에게 일러 말하시길, 「선조 고헌(苦軒)공께서 홍건적을 무찔러 광복(匡復)의 공훈을 세우셨는데, 지금 난리가 평정되지 못하여쓴데도 내 병이 이와 같으니, 선대 업적의 명예를 떨어뜨림이 없다고 해도 되겠느냐?」하시고 유연히 돌아가시니, 대개 임종(臨終)의 이 한 마디가 불꽃 같은 단심이라, 족히 평소 당신이 기약하심이 얕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경산 이씨이니 : 습독관 몽남의 따님이시오, 두분 아드님 중 숙(潚)은 동지 중추요, 흡(洽)은 봉사이다. 세 사위 중 곽 주는 참봉이요, 신 초는 현감이요, 성 율은 증 참의이다. 숙(潚)의 아드님은 자수, 자렴, 자락, 자홍이요 흡(洽)의 아드님은 자문, 자윤, 자증, 자명이요, 곽 주의 아드님은 별검 의창이요, 별검 유창이요, 형창이며, 신초의 아들 중 성주는 주부요, 경주는 선전관이요, 원주도 선전관이며, 성 율의 아드님은 하영, 하민, 하형이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정확(貞確)한 자품과 온유한 성품을 가지시어, 어버이를 섬김에 처음부터 끝까지 게을리 하지 않으시고, 적개심에 용맹하여 죽음으로 지켜 변함이 없으셨다. 입심(立心), 제행(制行)이 탁연(卓然)히 군자의 어려워하는 바 되나니, 여공(呂公)이 이른 바 좋은 세상의 기이한 보배라는 말을 진실로 알겠도다. 하늘이 이미 공에게 이와 같은 작품을 주셔 놓고 도리어 단명하게 하셔 빼어나고도 열매 맺지 못하게 하여 먼 훗날 사람들로 하여금 슬퍼하여 길이 상심하게 하셨으니 : 이는 어인일인고? 이에 공의 후손 대룡이가 그의 삼종조 태현과 족형 대규의 글을 받들고 나에게 명(銘)을 구하는 바, 내 돌아보건대, 나이 많아 쓸모 없음이 매우 심하나 차마 사양할 수 없는 일이라, 그 대개를 쓰고 이에 명(銘)한다

충효를 전하는 집안에 태어난 정직한 자품이었네.

장차 할 일이 있을 듯하였으나 이에서 그쳤으니,

옥계의 언덕에 흰 버들 슬픔을 머금었네.

이를 나타낸 명(銘)이 없다면, 어찌 멀리 전하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