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암(翠菴) 하경현(景賢)18세손

공의 휘는 경현(景賢)인데 초휘는 기현(起賢)이요, 자는 자중(子仲)이며, 호는 취암(翠菴)이다. 진주 하씨는 시조이신 고려 사직 휘 진(珍)으로부터 대대로 저성(著姓)이 되어, 6대조이신 경재 선생 휘 연(演)은 조선조에 들어와 영의정 벼슬을 지내시고 문효라는 시호를 받으셨으며, 고조이신 휘 철석(哲石)은 호군을 지내셨고, 증조이신 매계 휘 한우(漢佑)는 사직을, 조부이신 성재 휘 천수(千壽)는 참봉을 지내셨으며, 황고이신 모헌 선생 휘 혼(渾)은 익위사 세마로 경연 참찬에 증직되셨다. 선비 증 숙부인 순창 설씨는 교위 광범(光範)의 따님이신데, 선조 계미(1583)년 4월 10일에 공을 합천 야로현 내 묵촌에서 낳으셨다.

공은 천품이 순후하시고 바탕이 뛰어나신 바, 효제의 행실을 근본으로 삼고 시서의 가르침에 침잠(沈潛)하셨으니, 옥덩이 속에 옥을 감추었음이며 비단 위에 빛남을 더했음이다. 세속에 처하되 빠져들지 않으셨으며, 옛 가르침을 구하되 막힘이 없으셨고, 작록의 영화를 두려워하되 구렁 속에 몸이 빠지는 것같이 여기셨으며, 의리의 묘함을 좋아하되 맛있는 음식이 입을 즐겁게 하는 것같이 여기시었다.학문이 진작 진보하였으나 급급해하기를 능히 미치지 못한 것같이 하셨으며, 덕이 이미 닦아졌으나 겸양하기를 얻은 바 없는 것같이 하셨다. 경신(1620)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슬퍼함이 법제에 지나쳤고, 3년을 마치도록 초상 때와 같이 하셨으며, 경오(1630)년에 모친상을 당하셔서도 돌아가신 분 섬기기를 사신 때와 같이 하셨다.

상복을 벗은 뒤에 노계 선생 박 인로(朴仁老)로 더불어 서로 강론하고 창수(唱酬)하여 학문을 닦는 자료로 삼으셨다. 사방의 벗들이 이르면 허심탄회하게 하지 않으심이 없었으되 반드시 이단(異端)을 물리치고 정학(正學)을 지키는 것을 선무(先務)로 삼으셨으니, 날로 쓰신 문자등에 나타난 것이 모두 순순하였다. 기운이 쇠하고 병환이 들자 집서란을 당했는데 힘이 빠져 어쩔 수 없었으므로 드디어 동도의 심곡에 은거하시어 책에 뜻을 붙이고 송백(松柏)에 마음을 의탁하여 인하여 호를 취암(翠菴)이라 하셨으니 : 대개 공자의 「추운 겨울을 지난 뒤에야 시들이 않음을 안다.」고, 한 말을 취한 것이다. 항상 고요의 아홉 가지 덕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관율(寬栗) 두 자를 먼저 써 붙여 좌우명으로 삼으셨다.

계사년에 왕이 환도하여 노인에게 은혜를 줄새 첨지 중추부사에 제수되셨다. 갑오(1654)년 10월 10일에 병환으로 돌아가시니 향년이 72세 이었는데, 심곡 효문동 임좌에 장사되셨다. 배위 진주 정씨는 동진(東進)의 따님이신데, 묘는 동원(同原)에 있다. 3남을 두셨는데 : 큰아드님 영락(永洛)은 가선이요, 다음의 영호(永浩)는 첨지 중추요, 그 다음은 영식(永湜)이다. 영호는 3남을 두셨는데 : 남(楠)은 찰방이요, 다음은 현이요, 그 다음 정(檉)은 첨정이다. 영식은 4남이니 : 장사랑 석인(碩仁)이요, 석준(碩俊), 석신(碩信), 준서(俊緖)이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못한다.

아! 공께서 돌아가신 지 지금부터 3백 년이나 되어, 문적이 흩어지고 전하는 말도 거의 없어져, 후손들이 비록 그림자 속에서 방불함을 구하려 하나 속임이 아니면 망령스러움이 되는 것이니, 그 사이에 한 마디의 말인들 보태겠는가? 삼가 가승을 참고하여 상고하건대, 몸소 도의를 높이고 공경하기를 신명 섬기듯 하시고 믿기를 시구(蓍龜) 같이 하시어, 고명이 깊이 쌓이었으니, 주자로부터 거슬려 공자에게 이르러도 끝내 다른 말이 없을 터인즉, 덮어져 버려지지 못할 바이라, 이에 감히 이와 같이 써서 장차 덕을 아는 군자의 말을 구하노니 : 서찰(恕察)하여 주기를 천만으로 비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