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혼(河渾) 17세 선생의 휘는 혼(渾)이요 자는 성원(性源)이며 호는 모헌(暮軒)이다. 사직공의 17세손이며 문효공 할아버지의 막내 아드님 연당공 휘 우명(友明)의 4세손이다.선생은 어릴 때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침착 묵중하여 주위에서 말하기를 문효공(文孝公)집안의 명성을 떨칠 것이라는 칭찬이 자자하였다.아홉 살 때 당숙부 휘 안수(安壽)께서 후사가 없어 선생을 서울로 데려갔는데 집의 화려함을 싫어하여 서울에 거주하기를 사양하고 본댁으로 돌아왔다.뒤에 그 집안이 임해군(臨海君)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망하게 되니 사람들이 선생의 선견 지명(先見之明)에 탄복하였다. 1567년 순창설씨(淳昌薛氏)와 혼인하였는데 처가가 살림이 넉넉하여 토지와 종을 많이 나누어 주었으나 아낌없이 남에게 나누어주는 깨끗한 성품을 보였다.찬상을 당하여서는 상제 지키기를 예법에 따라 어김없게 하였고 형제간에도 우애가 남달리 두터웠다. 선생의 나이 44세 때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남에 문우(文友) 문경호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당신의 공(功)으로 삼지 않으셨다.임진이 평정된 뒤에는 선대(先代)의 구묘(丘墓)와 종토(宗土)를 비롯하여 양주의 발현재(發賢齋) 소속종토까지도 소속이 분명치 않던 것을 선생이 직접 찾아 지금의 현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종인들은 잘 모르고 있는 일화이다. 한편 임란이 끝난 8년 후인 1606년에 선생이 편찬한 만력병오보(萬曆丙午譜)는 문효공께서 편찬하신 경태신미보(景泰辛未譜) 이래 155년만에 나온 하씨의 족보이다.그러나 경태신미보는 그 서문(序文)만 전하고 있을 뿐이므로 모헌 선생이 만든 만력보(萬曆譜)야 말로 우리 하씨 족보의 효시라 해도 과언이 아닌 형편이다. 평소 선생의 성품은 조용하여 출세에 연연하지 않고 젊었을 때부터 남명(南冥)과 덕계(德溪)선생의 문하에 왕래하며 선비의 나아갈 바 큰 방도를 배웠다,또 정한강(鄭寒岡), 김동강(金東岡)등과 교유(交遊)하였는데 김 선생이 당신을 방문하여 지어준 시에 '종신토록 벗으로 변치 말자 라고' 한 싯구(詩句)가 있으니 선생을 얼마나 아꼈는가를 알 만하다.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최수우(崔守愚)가 무고를 입어 옥사하였을 때 선생이 상소하여 신원(伸寃)시키려다가 제지당한 일이 있고, 정온(鄭溫)이 간신배들에게 미움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자 선생이 상소하려 하였으나 정온의 만류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이는 다 우정이 돈독하여 화복을 돌아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1602년에 조정의 천거롤 재랑(齋郞) 세마사(洗馬師)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612년 선공감역(繕工監役) 장수찰방(長水察訪)에 임명되었으나 곧 물러났다.1617년 인목대비 폐모사건이 일어나자 문을 닫고 세상을 멀리하여 절구 상시음(傷時吟) 한 수를 짓되 '쑥대밭에 자주 빠지는 말이 뛰어가는 길은 가시밭이로다. 밤에 도깨비가 쥐어든 불빛 자기만 비추고 남을 비추지 않네' 라 하고 살던 마음을 둔평(遯平)이라 하며 남은 여생을 학자들과 소요하다가 1620년 향년 72세에 별세하였다,일생 동안의 청렴과 훈공이 인정되어 승정원 좌승지로 증직(贈職) 되었고 사림(士林)의 천거로문효공의 사당에 추배되었다. 배위는 증숙부인(贈淑夫人) 순창설씨이며 슬하에 6남1녀를 두었다. 아드님 경수(景受)는 군수, 경량(景量)과 경기(景紀), 경중(景中)은 통덕랑(通德郞), 경현(景賢)과 경달(景達)은 첨지중추를 지냈다.
합천선비<모헌하혼> 임진왜란 성주성 탈환작전 큰 공 중년에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고 늘그막에 독서와 뜻한 바를 추구하며 조상을 선양하는 일에 부지런히 힘쓴 합천 선비 모헌(暮軒) 하혼(河渾). 모헌은 1548년(명종 3년) 합천군 야로현(冶爐縣) 묵촌(默村)에서 증좌승지(贈左承旨) 천수(千壽)와 선산(善山)김씨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자는 성원(性源)이다. 본관은 진양(晉陽)으로 사직공(司直公) 진(珍)이 시조이다. 5대조 연(演)은 조선 문종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호는 경재(敬齋)로 효성이 지극하고 종신토록 경(敬)을 중요시 여겨 수학하였다. 또한 불교 개혁에 앞장서는 등 조선 초기 많은 업적을 남겨 문종의 사당에 배향되었으며 문효(文孝)라는 시호를 받았다. 조부 매계공(梅溪公)때 합천으로 이주하여 모헌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단정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보는 사람마다 " 능히 문효공 가문을 빛낼 아이"라고 칭찬을 하였다 한다. 9세때 인천의 종조백부(從祖伯父) 집으로 양자를 갔다가 집안이 너무 부귀하여 자신의 본래 뜻과 맞지 않다고 생각하여 19세때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를 봉양하였다. 20세때 순창 설씨(薛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고, 23세때 부친 성재공(惺齋公)이 세상을 떠나자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상을 극진히 치렀다. 25세때 남명의 부음을 듣고 조문하였으며 32세때는 한강 정구가 가야산으로 유람을 오자 역양 문경호(文景虎)와 같이 만났다. 역양 문경호(1556-1619)는 모헌과 동향인으로 내암 정인홍의 문인이며 임란때 창의한 인물로 평생 모헌과 학문을 토론하였던 절친한 벗이기도 하다. 33세때 진주 집현산에 있는 응석사(凝石寺) 보장고(寶藏庫) 논밭을 찾는 일에 앞장섰다. 응석사에는 선조인 송헌(松軒) 즙(楫), 고헌(苦軒) 윤원(允源), 목옹(木翁) 자종(自宗)의 영정을 보관하고 있었다. 1451년 문효공 하연과 친족들이 봄 가을 제사 지내는 비용을 충당하고자 논밭을 마련하여 '보장고'라 하였는데 세월이 지나가자 이 밭을 호족들이 차지하였다. 이때 모헌이 친족들과 함께 이를 진주 목사 김제갑에게 말하여 일일이 다시 찾은 일을 말한다 송헌은 모헌의 8대조로 진천부원군(晉川府院君), 7대조 고헌은 진산군(晉山君)으로 봉해졌으며, 6대조 목옹은 병조판서, 5대조 경재는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진주 사람들이 흔히들 '진주 姜,河,鄭'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여기서 '河'씨는 바로 이 집안을 두고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30대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헌은 이러한 혁혁한 조상의 유덕을 기리는 일에 앞장을 섰으니 당시 모헌의 명망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라 하겠다. 35세때 역양 문경호, 설학(雪壑) 이대기(李大期), 도촌(陶村) 조응인(曺應仁) 등과 함께 덕천서원을 배알하였다. 41세때 야로현 미숭산(彌崇山) 아래에 우곡재(尤谷齋)를 지었다. 모헌이 이때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기 위한 강학의 장소로 삼기 위해 역양 문경호 등과 조그마한 계곡 옆에 이 집을 지은 것이다. 이로부터 모헌은 우곡재에서 역양, 도촌 등과 함께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남명문인 수우당 최영경, 퇴계문인 월천(月川) 조목(趙穆) 등이 우곡재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44세때는 역양 등과 수우당 신원소를 올렸다. 45세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 10일 야로 숭산동에서 내암 정인홍의 창의에 동참하여 야로의 주학정(住鶴亭)에서 본진을 정하고 낙동강 연안의 마진 무계 안언전투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성주성 탈환작전 등 치열한 전투때 마다 큰 공을 세웠다. 송암 이로는 용사일기에 "정인홍은 합천사람을 총동원하여 야로에 진을 쳐 성주성에 웅거한 왜적을 괴롭혔는데, 하혼 조응인 정인영을 참모로 삼고 생원 정인준 진사 서적은 군량을 조달하게
하고 권양은 진중의 군수물자를 관리하고......"라고 하여 당시 모헌의 활약을 기록하였다. 왜적이 물러가고 나라가 평온해지자 52세때 둔평(遯坪)에 새로운 집을 짓고, 모헌(暮軒)이라 이름지었는데 세상의 번잡한 일들을 모두 끊고 자연과 벗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고자 하는 바람을 드러낸 것이다.
본관(本貫)진주(晋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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