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당공 휘(諱) 공헌(公獻)선조님의 묘소 : 경남 진주시 내동면 유수리 가호 산29
 

신당공(新塘公)하공헌(河公獻) 17세

조선조 제 14대 선조왕(宣祖王) 25~31년까지 7년간에 걸쳐 섬나라 왜구(倭究)의 침공으로 일어났던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우리 나라가 전쟁에 대한 아무런 대비 없이 당파 싸움에만 영일(寧日)이 없을 때 일본의 기습적인 침략으로 인해 참혹한 환란을 당하게 된 것이다.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쳐들어오는 왜군 앞에 우리 관군(官軍)은 힘없이 허물어지고 임금은 북쪽으로 쫓겨가야 했고 나라안은 아비규환(阿鼻叫喚)을 이루고 많은 백성은 비참하게 피를 흘렸다. 이에 뜻 있는 선비들과 백성들이 전국에서 자원해서 의병(義兵)으로 참전하여 분전(奮戰)타가 순절(殉節)하신 임란공신 중 진양하씨(晉陽河氏) 일족의 수는 국가에서 인정하는  인원으로 70여명이라 하나 그외에도 미확인된 진양하씨 전사자가 상당수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진양하씨 순국자(殉國者) 70여명 중 충청남도 보령시 소재 임란공신호국사(任亂功臣護國祠)에 모셔진 순국위패(殉國位牌)는 불과 사위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모셔진 사위 중 신당(新塘) 선생 한 분을 소개코자 한다.

신당(新塘)은 선생의 호(號)이며 휘는 공헌(公獻)이며 자는 희가(希可)이시다. 신당 선생은1554년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신천리에서 사직공의 16세손이신 공조참의(工曹參義) 휘 한(澣)의 다섯 아드님 중 둘째로 태어나셨다.다섯 분의 형제 중 세분은 후사(後嗣)가 없으시고 선생과 아우님이신 휘 공효(公孝) 두 분 선생의 후예들만이 대를 이어 가호(佳湖)문중과 태동(台洞)문중을 이루고 있다.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여 책읽기를 즐겨하시고 성장하면서 성리학(性理學)에 심취하여 사구(思究)가 깊으셨다. 평소에 사친지효(事親之孝)하셨고 형제간의 우애가 각별하셨다 한다.친상(親喪)을 당하여서는 다섯 형제가 일실(一室)에서 동거(同居)하면서 여묘종상(廬墓綜常) 하시는 모범을 보이는등 강굉(姜肱)과 사마광(司馬光)의 우애에 비교될 정도로 가정이 화목 하였다 한다.

선조 25년 왜구가 우리 나라를 침공해 왔을 때 천성적으로 의협심(義俠心)이 강하신 선생께서 즉시 보국쇄신(報國碎身)의 결연한 의지로 일어나셨다. 이때에 선생께서 인근 고을에 제시한 격문(格文)의 내용을 살펴보면 '충(忠)과 신(信)으로써  갑주(甲胄)를 가다듬고 예(禮)와 의(義)로써 간(干)과 노(櫓)를 들어 이 한 몸 나라를 지키는 방패로서 이 생명 바칠 것을 다짐하는 깃발을 높이 드노라' 하였다. 선생께서는 직접 갑옷을 입으시고 가솔(家率)과 이웃 친지, 그리고 집안에서 일하던 고용인 등 일백여 명을 인솔하여 진주성(晉州城)에 뛰어들어 김시민 등과 함께 힘을 합쳐 왜적에게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성(城)이 함락되자 장렬(將烈)히 순절(殉節)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순절시(殉節詩)를 남기셨다.

성조은택후(聖朝恩澤厚): 성스러운 나라 은혜 두터이 입었으니
복도막비인(覆禱幕非仁): 작은 고을에 엎드려 인의를 저버릴 수 있으랴
의유웅어변(義有熊魚辨): 하찮은 웅어도 의로움을 판별할 능력이 있나니,
서생순차신(書生殉此身): 비록 한낱 시생일 망정 어찌 이 몸을 나라에 바치지 않을수 있으랴.

선생께서 전쟁터로 인솔한 가솔과 고용인 등 전원이 순절함으로써 난리가 평정되면 다시 만나 자고 하시며 피난을 시켰던 부인과 어린 두 아드님을 끝내 만나지 못하고 불귀의 고혼이 되셨다. 선생의 충절(忠節)이 뒤늦게 조정에 알려져 융희 2년에 칙령(勅令)이 내려져 증 숭정대부사복사정(贈 崇政大夫司僕寺正)의 벼슬이 증정되셨다.선생의 두 아드님 중 둘째 아드님이신 휘 의(義)의 후예가 대를 이어 40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300여 호가 되는 가호문중(佳澔門中)을 이루고 조상이신 신당 하공헌(河公獻)선생의 충절과덕행(德行)을 추모하고 있다.선생의 충혼(忠魂)은 지금 충남 보령에 소재한 임란공신호국사에 340여 충혼과 함께 호국제단에 봉안되시어 계시는데 이는 진양하씨 가문에 큰 자랑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