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응림(河應臨) 17세


1536(중종 31)∼1567(명종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대이(大而), 호는 청천(淸川).참봉 영수(永水)의 아들로, 뒤에 작은아버지인 목사 억수(億水)에게 입양되었다.1555년(명종 10)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또  이 어른은 1559년 약관 23세의 나이로 경회루 정시 을과에서 장원급제(壯元及第)에 올라 홍문관 교리와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로 봉정대부(奉政大夫) 정4품의 벼슬에 올랐으나 아깝게도 32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이 분이 남긴 문장과 문집이 실록에 많이 남아있는 큰 문장가였다고 사실(史實)은 전하고 있으나 정작 간직해야 할 직계 문중에는 한 권의 문집도 보존하지 못하고 있다.


1566년 정언을 거쳐 공조정랑이 되고, 이어 예조정랑이 되었다. 문장이 뛰어나서 조선 중기의 학자들 중에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며, 송익필(宋翼弼) 등과 함께 8문장으로 일컬어 졌다. 그는 항상 면학에 힘쓰는 한편 송나라 소식(蘇軾)의 문장을 사숙하였으며, 시(詩)와 서(書)는 물론 그림 솜씨도 뛰어 났다 공의 휘는 응림(應臨)이요 나이 경우 열 살일 때 기동(奇童)으로 일컬어졌다 어떤 어른이 죽순을 제목으로 하여 운(韻)자를 부르니 공이 대답해 이르기를


「평지에 홀연히 송아지 뿔이 나고 바위 사이에 처음으로 용의 허리 펼쳐졌네
   어찌하여 나를 꺾어 신 젓대 만들어 태평행락조(太平行樂調)를 지어 부를고?」


하였다 그 나이 어려서 과거에 급제함에 이르러는 당신의 기사(奇士)를 헤아릴 때 공을 으뜸으로 삼았었다. 재행(才行)과 문망(聞望)이 그 집안을 이을 듯하였으나 불행히 일찍 돌아가시니 벼슬이 정랑에 그쳤다. 지은 바 시문(詩文)이 많이 해동문선(海東文選)에 실려거니와 일찍이 서교(西郊)에서 손님을 보내면서 시를 지어 이르기를


「쓸쓸한 서교(西郊)길에서 봄바람에 술한잔!
   청산에 사람 보이지 않고 해지는데 나 홀로 돌아오네


하시니 당시에 유명했던 시구(詩句)


「산중에서 서로 헤어진 뒤에 해저문 그림자 사릿문을 가리네


한 것과 나란히 일컬어졌으나 식자(識者)들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공의 벗이 멀리 호남 지방을 유람하던 중 날이 저물어 청판(靑板)으로 돌아가다가 다릿가에서 홀연히 만나 말(馬)을 세우고 안부와 가정사를 묻고 귀가하여 물으니 이미 장사하였다고 하였다 1559년에 경회루(慶會樓)정시(庭試)과거에 을과 1등으로 급제할 때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이 장원이었는데 명종이 공에게는 활을 내리고 고경명에게는 말을 하사이시니 고경명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민첩한 그대 재주 꺾을 이 없는데 볼품없는 내가 감히 으뜸을 다투었네 홀연히 좋은 말이 하늘에서 옴을 보고 도리어 노새 같은 단재(短才)를 부끄러워하노라」 하였다 벼슬은 사예(司藝) 교리(校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