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당공 휘(諱) 개(漑) 선조님의 묘소  :  경남 합천군 야로면 구정리 산 5 

임당공(林塘公) 하 개(河漑)17세손

옛 어모장군, 용양위 부사과 증 통정대부 공조참의 진양 하공 휘 개(漑) 자 장원(長源) 호 임당(林塘)은 1550년에 출생하여 1591년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42세였는데, 합천 야로(冶爐)의 북산 자좌에 장사되었다. 지금에 이르러 공의 시대가 3백여 년이나 되었으나 비석이 없었는데, 모든 후손들이 비석을 세워 선대에서 미치지 못한 일을 이루려 하니, 이는 추모하고 보답하는 독실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다. 후손 종민(鐘玟). 종한(鐘瀚). 석용(錫容)이 공의 유록을 갖고 경덕재(景德齋)로 나를 찾아와 비문을 간청하는데, 내가 그럴 만한 사람이 못 되므로 사양하였으나 끝내 거절지 못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하씨 시조는 고려 사직 휘 진(珍)이시다. 대대로 벼슬이 이어져 많은 명석(名碩)과 보상(輔相)을 배출하였고, 조선조에 들어와 문효공(文孝公) 경재 선생 휘 연(演)이 세 임금을 섬겨 돕고 간(諫)하고 하여 요순 시대의 정치를 이룩하여 문종묘정에 배향되었으니, 이 분이 공의 6대조이시다. 고조의 휘는 우명(友明)이니 중추부사요, 호가 연당(連塘)인데 효행으로 타진당(妥眞堂)에 배향되었으며, 증조의 휘는 철석(哲石)이니 용양위호군인데 역시 효행으로 이름이 나셨다. 조부의 휘는 한우(漢佑)이니 충무위사직이요, 황고의 휘는 천수(千壽)이니 정릉참봉으로 통정대부 경연 참찬관에 증직되었으며 호는 성재이다. 선비는 증 숙부인 선산김씨(善山金氏)이니, 참봉 영시(令始)의 따님이다.

공은 천품이 순미하고 인품이 단아(端雅)하였는데, 효도로써 부모를 섬기고 형님에게 공경으로 우애하였다. 집에 계실 때나 사물을 접할 때 한결같이 성신(誠信)으로 하였으며,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자신을 성찰함을 근본으로 삼으셨다. 자연 속에 뜻을 붙이고 도서(圖書)를 집안에 가득히 하였으며 도의를 함양하여, 유일(遺逸)로 여러 번 천거되어 본직(本職)에 이르렀다. 배위는 숙인(淑人) 청주 한씨(淸州韓氏)이니, 장령 극복(克復)의 따님이요, 몽계 철충의 후예인데, 완순하고 부덕이 있으셨다. 묘는 상하분이다.

아드님 한 분을 낳으니, 휘는 경신(景新)인데, 용양위 부사과이다. 이 분이 휘 진효(晋孝)를 낳으셨는데, 통훈대부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증직되었다. 휘 진제(晋悌)는 후사가 없다. 휘 진호(晋豪)는 봉렬대부 정략장군(定略將軍)이다. 진효의 아들 휘는 필형(必泂)인데 통정대부 형조참의에 증직되었다. 휘 필원(必源). 필호(必灝). 필운은 벼슬하지 않았다. 진호의 아들 휘는 필대(必大)인데, 우후(虞候)이다. 그 밖은 기록하지 않는다. 공이 문무 겸전한 재주를 가지고 장상(將相)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벼슬을 좋아하지 않고 도서에 잠심하여 의리를 탐구하다가 천거에 응하여 벼슬에 나아갔는데 추상 같은 기백을 잠시 시험한 거 스스로 나라에 공을 입히고 돌아가시매 증직을 받게 되셨다.

그 아름다운 말과 큰 지혜를 반드시 얻을 수 있을 만도 한데, 세대가 오래 되어 상세한 자료를 얻을 수 없다. 그러나, 효우를 집안 다스림의 근본으로 삼고, 글을 읽되 도의로써 주장을 삼으셨으니 그 나머지는 미루어 알 수 있는 일이다. 어찌 나의 부족한 언사를 기다리리요? 이에 명(銘)한다.


학업을 일찍 성휘하고, 재기(才器)는 뛰어났네.

마음은 도리를 깨달았고, 행실은 효우에 독실하였네.

대본(大本)이 이미 서니, 만 가지 선(善)을 모두 지니시었네.

인(仁)과 지(智)로 행동하고 문(文)과 무(武)를 겸비하셨네.

뜻을 산수(山水)에 붙여 부귀를 구하지 않으셨네.

벼슬하여서는 용감히 도적을 막으셨네.

하늘이 수(壽)를 주지 않아 큰 뜻을 이루지 모하셨네.

성주(聖主)가 증직을 내리니, 슬픔과 영화가 실로 두터웠네.

높은 저 북산은 무덤 있는 곳, 오랜 세월 뒤에 비로소 비석을 세웠네.

실적을 간추려 비명을 새김은 길이 후세에 보임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