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군공(護軍公) 하익정(河益精)16세손

 

천왕동(天旺洞)경좌(庚坐)의 무덤은 곧 우리 선조 호군공(護軍公)의 묘소인데 병화의 침노로 옛 비석이 훼손되어 그 덕업을 고징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원근의 일가들이 돌을 깎아 세움에 있어 나에게 비문을 청하는 바  돌아보건대 내 어리석고 못나서 그 대략이나마 기록할 수 없으나 또한 감히 사양할 일이 아니어서 삼가 살피옵노니 부군(府君)의 성은 하씨요. 좌랑공 휘 제명(悌明)선조님의 후손이시다  선대의 빛나는 자취는 선고(先考)좌윤공(左尹公)의 묘갈명에 서술하였으므로 생략하거니와 판관(判官)휘 윤문(潤文)이 공의 본생 선친이시다.

부군(府君)의 휘는 익정(益精)인데 어려서부터 물 뿌리고 청소하심과 부모님께의 조석 문안이 천연스러웠다. 능히 글을 읽으심에 부지런하여 책상을 떠나지 않았다. 20세에 이미 큰 기국(器局)을 이루어 사우(師友)들과 사귀며 행실과 식견을 높히었다. 의(義)를 지킴이 더욱 강직하였으니 세상이 맑으면 나아가고 궂으면 멈추어 행세(行世)의 법을 바르게 하셨다.

1506년에 정국2등공신(靖國二等功臣)으로 책정되어 공신록(功臣錄) 2권에 기록되었다. 마나님 숙인(淑人)전주 이씨(全州李氏)의 묘는 군자면 정왕리 안산 묘좌(君子面 正往里 案山卯坐)에 이장(移葬)되었다가 다시 옮겨져 합봉되었고 계배(繼配) 나주 나씨(羅州羅氏)도 부군(府君)과의 합봉으로 묻히셨다. 아드님들 휘는 담(淡) 잠(潛) 백련(白蓮) 치손(致孫)인데 휘 담은 호군(護軍)을 휘 백련은 부사과(副司果)를 지내셨다 손자의 휘는 용손(龍孫) 숙손(淑孫) 계손(季孫) 망중(望重) 경청(景淸) 계청(繼淸) 성(성)인데 휘 용손은 사직(司直)을 숙손은 참봉(參奉)을 계손은 좌랑(佐郞)을 지냈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부군(府君)의 영특하신 재예(材藝)와 심오한 학문이 속으로 가득하여 밖으로 펴져 빛남이 필시 많았을 것이언만 고징할 문헌이 없으며 1462년에 출생하신 일 이외에는 자(字)와 호(號)와 졸년(卒年)의 기록도 찾을 수 없으니 통한스러움 그지없는 가운데 집안에 전해지는 말을 위와 같이 쓰는 바이다. 비를 세움에 처음에서 끝까지 애를 쓴 사람은 후손 규홍(奎泓) 준호(準鎬) 이수(怡秀) 재민(在玟) 취홍(聚泓)이다 이에 명(銘)한다. 부모님을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시며 나라 위해 충성을 다하시고 남은 시간에 문장을 이루셨으니 경사의 흐름은 그지없으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