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사공(府使公) 하정(珽)16세손

공의 휘는 정(珽)이요, 자는 사휘(士輝)요, 성은 하씨이니 : 진양인이시다. 고려 때에 원정공 휘 즙(楫)께서 진천 부원군에 봉해지셨는데, 이분이 공의 윗대 조상님이시다. 원정공께서 진산 부원군 휘 윤원(允源)을 낳으시고, 진산 부원군께서 군사(郡事) 휘 계종(啓宗)을 낳으시고, 군사공께서 현감 휘 척(滌)을 낳으시고, 현감공께서 청백리(淸白吏) 휘 맹질을 낳으시고, 청백리공께서 우시직(右侍直) 휘 주(澍)를 낳으시고, 시직공께서 부위(副尉) 휘 구년(龜年)을 낳으셨는데 이 부위공이 공의 아버님이시다. 선비님은 진양 강씨(姜氏) 판서 숙경(叔卿)의 따님이시다.
공께서 풍채가 준엄하시고 도량이 크고 넓으시어 큰 인물이 될 그릇을 지니시었다. 1518년 5월에 묵재(墨齋) 노 필이 공께서 장수(將帥)의 재질이 있으심으로 하여, 특별히 천거하여 김해 부사(金海府使)로 삼으니, 충암(沖癌) 김 식(金湜)이 송별시(送別詩)를 지어 주어 가로대,

 

 「큰 그릇은 높은 시망(時望) 받았는데,
   어찌 바닷가 한 구석을 맡았는고?
   물굽이 고을에서 큰 칼로 시험하고

   어머님전에 채색 옷 놀이로 효도하였네.
   벼슬의 높낮음 말하지 마소,
   본디 마음 베품이 귀함 되나니. 잘 가오,
   하늘 끝 멀리 가는 나그네 강산을 향해 길이 기약하세나」


라 하였으니, 대개 이는 서로 마음을 앎으로 허(許)함이었다. 얼마 안 되어 아첨 잘하는 이 신(李信)이란 사람이 대사성(大司成) 김식(金湜)이 김해의 관청에 투숙(投宿)하고 갔다고 고하였기로, 금부도사(禁府都事)가 창녕 현감 성 희문(成希文)과 함께 달려가 김해(金海)에 이르렀더니, 부사(府使) 또한 이미 달아나시었는데, 때의 의론이 금부도사와 창녕 현감이 일부러 놓아주었다 하였으므로, 다 매맞아 변지(邊地)로 귀양갔다.

뒤에 공께서 붙들려 신문을 받으실 때 매가 4백여 대에 이르렀거니와, 마침내 참혹(慘酷)한 화를 면(免)하지 못하고 아울러 가산(家産) 이 몰수(沒收)되었으니, 아 아깝도다, 하늘이 어찌 선인(善人)을 도우려 하지 않으셨던고? 선조 계유년 곧 1573년에 연신(筵臣) 신 점(申點)이 억울히 돌아가신 원통함을 극구 말하고 간원(諫院)에서 연대어 아뢰고 대신(大臣)이 뜻을 함께하니, 왕이 비로소 교지를 내리어 「하 정이 김 식으로 더불어 하룻밤을 같이 잔 때문으로 간사한 자의 모함을 입어 몸이 중형을 받고 적몰되었거니와, 이제 공론이 크게 일어나는 바, 지난날의 여러 어진 사람들이 다 설원(雪寃)의 은전을 입었음에도 홀로 하 정만 착함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구천(九泉 : 저승)에서 원통함을 머금고 있으니, 이는 선비를 보호하고 억울한 원통함을 풀어주는 일에 자못 어긋나는 일이다.」하고, 그 관작을 돌이키고, 가산을 돌려 주니, 공의 마음과 행적이 비로소 횃불처럼 천하에 밝혀졌음이로다.

아, 지금이 공의 시대로부터 멀고 먼 때이라, 화를 입으시어 인멸(湮滅)한 유적(遺蹟)을 가히 고징할 수 없도다. 그러나, 충암 김 식(沖庵金湜)의 송별시와 기묘 명현(己卯名賢)들의 기록이 있어 널리 이목(耳目)에 전파되어 있고 국사(國史)에 실리어 있어 족히 백세에 전해져 없어지지 않나니, 유감이 풀린 셈이다. 이에 명(銘)한다 :

충암(沖庵)과 본디 친하셨고, 정암(靜庵)과는 같은 학파시었네.

몸은 참혹히 돌아가셨어도 도(道)는 펴졌고,

뼈는 썩었어도 이름은 빛나네.

신원(伸寃)함 내리어 원혼이 비로소 풀리었으니,

천하에 권하여 알 게 하기 위하여 이에 이 돌에 새기어 전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