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판공(通判公) 하홍(河泓)16세손

하공의 휘는 홍(泓)이요 자는 언영(彦泳)이요 본관은 진양이다, 고려 때 휘 즙(楫)께선 중대광부 숭록대부에 봉해지시고 원정(元正)이란 시호를 받으셨는데 호를 송헌(松軒)이라 하시었다. 휘 윤원(允源)께선 공민왕조에 전리총랑(典理總郞)으로서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시어 공신(功臣)으로 녹훈(錄勳)되시었다. 휘 계종(啓宗)께선 공양왕 때에 형조정랑(刑曹正郞)이 되시어 포은(圃隱)정몽주 와 더불어 상소하여 신돈(辛旽)의 죄를 논(論)하시었다, 이조(李朝)에 와서 휘 척(滌)께서 현감(縣監)을 지내시고 처음으로 창녕(昌寧)에서 사시었는데 이분이 공의 고조님 이시다, 증조님의 휘는 맹질(孟질)인데 군수(郡守)를 지내시어 청백(淸白)함으로 드러나시었고 조부님의 휘는 주(澍)인데 시직(侍直)을 지내셨고: 황고님 휘는 구수(龜壽)인데 현감을 지내시었다. 선비(先비)님 이 숙인(李淑人)은 전의인(全義人)이시고 김 숙인(金淑人)은 창원인(昌原人)이시다.

성종 때 1485년에 김 숙인께서 공을 낳으셨는데 특이한 바탕을 타고나시었다, 어려서부터 언어와 행동거지(行動擧止)가 단정하시어 보는 자 큰 인물 되실 것을 기대하였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시어 여러 고을의 원님을 지내시어 청렴하다는 칭송을 받으셨는데 중종 기묘년에 북문(北門)의 화(禍)가 일어남에 미쳐 어진 분들이 다 죽어 갈 때 종형님 도호공(都護公)께서 또한 억울하게 형벌을 받으시니 공께서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가 두 형님과 함께 강가의 정자에 은거(隱居)하여 낚시질을 일삼고 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아니하시었다.

1547년에 향년 63세로 돌아가시어 창녕 서쪽 옥천(玉泉)땅에 묻히시었다. 마나님 숙인(淑人)김해 김씨는 군수 석공(錫貢)의 따님이신데 4남 1녀를 낳으시었다, 아드님 함(艦)님께선 우후(虞侯)를 지내시고 현(舷)님께선 숙부님의 양자로 나가시고 항(航)님께선 직장(直長)을 황(황)님께선 내금위(內禁衛)를 지내시었다. 따님께선 군수 최 홍의(崔弘義)님에게 출가하시었다. 이에 명(銘)한다

벼슬이 수령에 그치니 쌓은 덕을 다 못 펴셨음이요

자취를 낚시질에 붙이시니 내 좋아함을 좇으심으로다.

유문(遺文)이 흩어짐은 병난을 겪은 때문이어니와

아름다운 이름은 크게 빛나니 돌에 새기어 밝히는 바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