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제공(別提公) 하관(河灌)16세손

나의 벗 언옥(彦沃)의 성은 하씨요 이름은 관(灌)이요 본관은 진양이다. 7세 조 휘 즙(楫)께서는 고려조에 현달(顯達)하시어 원정공(元正公)이란 시호를 받으시었다. 이로부터 큰 벼슬과 작위(爵位)가 이어졌으니 우리 나라 사람 중 문벌로 이름 높은 자 하씨의 번성을 넘지 못하였다. 휘 맹질(孟질)은 청백리(淸白吏)시었고 휘 주(澍)는 세자 우시직(世子右侍直)이시엇는데: 이분들이 군의 증조부님, 조부님이시다. 황고(皇考)님 휘는 구수(龜壽)인데 벼슬이 연일 현감(延日縣監)에 이르렀다. 선비(先비)님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부사(府使) 계손(季孫)의 따님이시오. 영상(領相) 구 양(具揚)의 외손이시다,

성종 때 1483년에 탄생하였는데 군이 형제 중 둘째이다. 젊어서 뛰어나고 남달리 활 쏘기와 말 타기를 익히었으나 중도에 버리고 향리(鄕里)에서 살아 충효로 영남에서 이름이 나니 같은 고을의 찬성(贊成) 이 희강(李希剛)이 군기시 별제(軍器寺別提)로 천거하였다. 언옥(彦沃)이 고향에 돌아가 묻혀 정자(亭子)를 황강(黃江)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곳에 지어 형님 상사공(上舍公) 언함(彦涵)님 및 아우님 통판공(通判公) 언영(彦泳)과 함께 같은 방에 거하여 집 이름을 삼우당(三友堂)이라 하고 늘 한가로이 낚시줄을 드리워 마음을 풀어 만족해하고 또 현판을 걸어 어부정(漁父亭)이라 하였다. 군의 성품이 너그럽고 근후(謹厚)하여 사람 대함에 있어 성내는 일이 없었으니 고을 사람들이 더욱 칭찬하였다

병으로 1537년 12월 19일에 작고하였는데 유명으로 창녕현 서쪽 옥야촌 오배 녹산(沃野村 鰲背綠山)에 터를 잡아 2년뒤 정월 초하루에 그 곳에 장사하였다. 첫 부인 내금위(內禁衛)광주 이씨(光州李氏) 취(취)의 따님에게선 후사(後嗣)가 없었고 계배(繼配) 야성군(冶城君)송 길창(宋吉昌)의 5세손 헌(憲)의 따님께선 2남 2녀를 낳으신 바: 남은 자라지 못하였고 2녀는 각각 사인(士人)이 춘남(李春男) 찰방(察訪) 권 수(權守)에게 출가하였다. 아우님 홍(泓)의 아들 현(舷)으로 후사(後嗣)를 삼았는데 현이 군(君)의 행적으로 묘비를 세우려 하여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글을 청하므로 이에 명(銘)한다

벼슬은 누구나 그리워하는 것인데 그대는 그 벼슬 이루었고

부요(富饒)는 누구나 바라는 바인데 그대는 그 부요도 얻었도다.

벼슬하되 현달(顯達)을 구하지 않아 돌아가 숨었고 부요하되 욕심내지 않았도다

이 두가지를 두고 조물주에게 여쭌다면은 이를 탄식하되

그대 이미 눈감았거니와 백세의 뒤에라도 나의 글이 부끄럽지 않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