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공신 휘(諱) 운(雲)선조님의 묘소 : 충북 청원군 강내면 다락2구

참봉공(參奉公) 하운(河雲)16세손

선현들이 말하되 절개 있는 선비는 삶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좋은지고 이 말이여! 그러나 지식과 행동을 아우른 사람이 드문데 오직 참봉 하공은 능히 그것을 실천한 분이다 공의 휘는 운(雲)인데. 초휘(初諱)는 운(澐)이었다 선대 세덕(世德)의 빛났음은 선세의 행장과 비갈명에 많이 적혔으므로 생략하노라 증조님 휘는 정서(呈瑞)인데 사헌부 감찰이었는데 좌승지로 증직되셨고 조부님 휘는 연(漣)인데 영희전(永禧殿)참봉을 지내셨다. 황고의 휘는 영호(永浩)인데 통덕랑이었다. 선비(先비)는 공인 경주 송씨(慶州宋氏)와 공인 임천 황씨(林泉黃氏)이다 공의 기개와 도량이 준걸스럽고 뜻이 굳세었으며 부모님 섬김에 효성을 다하고 글을 읽음에 힘을 다하였는데 여가 있는 날 활 쏘고 말 타기를 익히면서 말하기를「대장부는 세상에 처하여 마땅히 충효가 겸전하고 문무가 일치한 연후에 비로서 사람의 도리를 다하게 되는 것이다

옛날에 이르길 군사란 천 날을 쓰지 않을지라도 하루도 갖추지 않아서는 안된다고 하였으니 어찌 서생(書生)으로 스스로 자신을 높이어 무사(武事)를 등한시하겠는가? 만약 강력한 도적이 침입하여 나라가 위태할 때 갑옷 입고 말을 몰아 적을 섬멸하고 나라를 구원하여 공을 사직에 세우고 이름을 역사에 전한다면 이는 충효를 아울러 빛내는  일이다」하고 이로써 스스로를 기약하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병이 바다를 건너온 지 열흘 남짓하여 온 나라가 쓰러져 임금이 피난하는 등 형세가 바람 앞에 촛불과 같을 때 공이 참봉(參奉)으로서 뛰쳐 일어나 임금을 도와 자신을 잊고 분투 하실때 상처를 안고 백전하여 화살과 돌 보기를 마치 단 엿 보듯 하며 차라리 호랑이 처럼 싸우다 죽을지언정 쥐와 같이 살기를 도모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침으로 삼아 거의 승전하려는 찰나 마침내 적의 칼날 아래 순절하여 이등공신에 녹훈되셨으니 나약하고 겁많아 초목과 같이 썩는 자와 견주면 누가 더 영광스러우며 누가 더 욕스러운가? 그 충성의 열렬함이 천 년토록 무너진 풍속을 깨우치는 바이로다

묘는 청주군 강내면 가작동의 갑좌이다. 배위는 공인 해미 곽씨(海美郭氏)인데 묘는 쌍분이다 두 아드님을 두었는데 큰아드님은 경복(景福)은 통덕랑이요 다음 경록(景祿)도 역시 통덕랑인 바 두문불출하고 글을 읽고 수신제가하여 직분을 다하셨다. 손자 덕원(德源)은 가선대부 동지 중추부사인데 효성이 천성에서 우러나서 부모님 사셨을 때에는 극진히 봉양하고 돌아가셔서는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높은 학문과 기절(氣節)로 난리를 당하여 순절하셨으니 반드시 인멸되지 않을 자취가 많은 것이로되 8년의 난리에 문헌이 화재에 타 버리고 보첩에 수록되어 있는 것마저 이 같이 소략(疏略)한 몇 구절에 그치고 생졸한 날짜도 고징할 수 없으니 한탄스러움을 어찌 이루 다 말하겠는가? 지금 후손 상돈(相惇)이 일족들과 함께 비석을 세우려 계획하고 나에게 비문을 부탁하는데 나의 후생멸학(後生滅學)으로 어찌 아름다운 자취를 천양하겠는가 하고 사양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지 못하여 삼가 이와 같이 쓰고 명(銘)한다.

기개는 굳세고 재예는 뛰어났네

 문무에 능하여 의리는 군친(君親)에 중하였네

임진년에 왜병이 침범하니 녹을 받은 신하들이 무릎 꿇고

삶을 도모하매 임금은 피난하고 백성은 어육(魚肉)이 되었네.

의(義)로 일어나 임금을 보살피니 어두운 밤에 빛나는 별이었네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 대적할 수 없었으나 열렬히 순국하시니

혁혁한 끼침이여 세월이 오랠수록 더욱 새로우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