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안(樂安)군수(郡守공) 하숙산(河叔山)15세손
 

 

공의 휘는 숙산(叔山)이요, 자는 안인(安仁)이며, 호는 주은이니, 고려 때 명신인 진산부원군 휘 윤원의 셋째 아드님 군사공 휘 계종(啓宗)의 현손이다. 증조님은 중정대부 숙(潚)이요, 조부님은 통정공 휘 만지(萬枝)이며, 선고님은 부사공 휘 자곤(自崑)이다. 공은 진주 서쪽 신대리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여 묻기를 좋아하고 학문에 힘쓰더니, 장성하여서는 성품이 정직하고 굳세어서 이치 아닌 일에 굽히지 않고 처사를 엄명히 하셨다.1461년에 진사가 되고 이듬해 정월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계원(桂院)에 배속되어 실무를 연구하셨으며, 벼슬길에 올라 여러 차례 낭서(郎署)를 거쳐 1471년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는데, 그 때 마침 임금이 동쪽 교외로 놀러 나간 일이 있어 공이 간하여 말씀하기를 「요전 날 교외에 놀러가시기 위하여 경연(經筵:신하가 왕도를 강론하던 일)을 정지시키셨다 하옵는데, 신은 경연을 마치고 나가시더라도 늦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옵니다.

그리고, 그 날에 경기도 관찰사 이철견(李鐵堅)이 친히 해청(송골매)을 진상하였다 하옵는데, 백성의 어려움을 아뢰는 것이 감사의 직책이거늘 송골매를 진상한다는 것은 불가하다 하겠습니다. 지금 듣잡건대 그 송골매를 내응방에 두게 하셨다 하니, 신은 앞으로 임금님을 맞이하옵는 이들이 이렇게 진상하는 일을 따를까 두렵사옵니다. 옛 사삼이 말하기를 귀한 물건을 좋아하면 뜻을 상하게 한다 하였으니 워넌대 유념하소서」하시니, 임금이 이르시되 「그대의 말이 옳도다. 경연을 정지시킨 것은 나의 허물이나 송골매는 내가 좋아하여서가 아니라 대비를 위하여 얻어 온 것이다」하셨으니, 이에 그 강직하고 거리낌 없는 기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1474년에 낙안(樂安) 군수를 배수하고 마음을 쏟아 직무에 힘써 매우 현저한 치적이 있었으므로, 사관(史官)이 기록하기를 「하숙산은 지기가 강개하여 아첨하거나 권력에 굴함이 없는 사람이다. 낙안 군수가 되었을 때 감사 이극균(李克均)이 순시차로 순천에 가고 하숙산도 공무차로 순천에 이르게 되었는데, 마침낙안군에서 방물인 범 가죽을 감사의 감영에 바칠 때 아전이 아뢰기를 「만약 딴 뇌물을 쓰지 않으면 호피를 끝내 바칠 수 없습니다」하거늘 하숙산이 응하지 않았더니, 과연 납부하지 못하였고, 사람을 시켜 면포 다섯 필을 감사 영리(營吏)에게 준 뒤에야 납부할 수 있었다. 이에 하숙산이 노하여 영리를 불러 꾸짖어 말하기늘 「한 개의 호피를 바침에 뇌물이 없으면 바칠 수 없고 뇌물을 주면 바칠 수 있으니, 우리의 피폐한 고을에서 방물 갖추기도 매우 어렵거늘 너희가 뇌물 구하기를 끝없이 한다면 무엇으로 감당하겠는가?」하고 졸개들을 시켜 묶어 놓고 때리기를 수 없이 하였다. 도사(都事:감사의 비서)가 듣고 감사에게 고하니, 감사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강맹한 사람이니 참아야 한다. 또, 아랫 사람을 단속하지 못했음은 우리의 죄다」하고 사람을 시켜 사죄하니, 그제야 하숙산이 화를 풀었다」고 하였다.

임기가 끝나매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니, 대사간 손비장(孫比長)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전적(典籍) 하숙산이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갔는데, 이 사람은 일찍이 문과의 장원으로 낙안 군수가 되었을 때 정치함이 특이하여 고을 백성들이 칭모(稱慕)하여 마지 않았으니, 마땅히 발탁하여 청렴하고 벼슬을 탐내지 않는 사람을 권장하소서」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내가 부끄러워할 일이로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정황을 보고 일어남에는 하루도 기다리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 사람이 돌아가는 것을 어찌 알지 못하였던고? 하숙산은 그 전에 전언으로 일을 때부터 내가 그의 사람됨을 알고 있었노라」하고 유예하여 며칠이 되어도 결단하지 못하므로, 손비장이 다시 아뢰기를 「하숙산이 일찍이 수령이 되어 정치는 맑고 간명하게 하기를 힘썼고 또, 성품이 강직하여 구차하게 세상에 붙어 따르지 아니하여 그 지조와 행동이 가히 취할 만하니, 만약 임명하여 대간(大諫)을 삼는다면 저 사람은 장차 품은 뜻을 폐서 온 힘을 다하여 충성할 것이오니 그리 함이 사람을 쓰는 도에 마땅할 것이로소이다. 청하옵건대 불러 쓰소서」하니 임금이 허락하고 곧 소용(召用)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명이 공에게 이르기 전에 향리에서 돌아가시니, 그 애석함을 이루 말할 수 있으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