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判官公(하중호)선조님 묘소

하중호(河仲浩) 14세손
 

선생의 휘는 중호(仲浩)요 벼슬은 조봉대부(朝奉大夫)예빈시 판관(禮賓寺 判官)이다  문효공 할아버님의 둘째 아드님이신 좌랑공 휘 제명(悌明) 할아버님의 외동 아드님이시다
1425년에  돈의문 밖에서 태어나셨는데 풍채가 단아하고 재주가 뛰어 났으며 말씀이 적고 기상이 화평하며 효성이 지극하며 학문도 깊어 보는 사람마다 모두 칭찬하였다  
벼슬에 올라 거산찰방(居山察訪)을 역임 했는데 예빈시 별제(禮賓寺 別提)로 계실 때에 명(明)나라 사신을 선대(善待)하였으므로 판관으로 승진 되셨다

단종(端宗)이 물러남에 따라 아버님 좌랑공 (佐郞公)께서 식음을 끊고 돌아가시니 공이 몰래 영월(寧越)땅에 들어간일로 많은 고초를 겪다가 뜻을 펴보지도 못한채 돌아가셨는데 당시의 사정으로 사관(史官)들은 이러한 사실을 기록하지 못하였고 야사(野史)를 쓰던 창계공(滄溪公)이 양세(兩世)의 충절을 기록하여 숨겨 전하여 졌다 마나님 영인 (令人) 강릉 함씨(江陵 咸氏)는 문희공(文僖公) 우치(禹治)의 따님이요 정평공(定平公) 부림(傅霖)의 손녀이시다

장남 휘 윤문(潤文)은 판관이었는데 함경도로 귀양가신 뒤 소식이 끊어졌고, 차남 휘 한문(漢文)은 한성 좌윤(漢城左尹)을 지내셨다.
두분은 묘소가 없고 후손들이 설단을 마련하여 묘소를 대신하고 있다가 2009년 다시 가묘로 단장해 묘사를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