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조참판공 하맹윤(河孟潤)할아버님의 묘소:충청북도 청원군 현도면 우록리

형조참판공 하맹윤(河孟潤) 14세손
 

선생은 사직공(司直公) 14세손(世孫)으로 문효공(文孝公)의 장자(長子)이신 참판공 휘 효명(孝明)의 다섯 아들 중 막내아들로 1439년 세종때 출생하였다. 선생은 성품이 검소하여 사치스러움을 좋아하지 아니하였으며 평소 몸가짐이 단아하고 간결하여 권세와 세도가의 대문을 출입하는 일이 없이 매사를 공정하고 의롭게 대하니 사람들이 선생을 공경하고 따르며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초시(初試)를 거쳐 32세의 늦은나이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초급관리를 두루 거쳐 1486년 47세의 연세에 외직인 창성부사(昌城府使)와 경관직인 내자시(內資寺)인 첨정(僉正)과 훈련원 부정(副正)을 역임하고 1490년 특진(特進)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당사관의 품계를 제수 받고 강계부사(江界府使), 안주목사(安州牧使) 를 역임하시고 충청,전라 양도(兩道)의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거쳐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 자리에 영전하셨다.선생은 가시는 곳마다 청렴하고 공평무사하게 업무를 다룸으로서 목민관(牧民官)으로서 맡은 바 소임을 완벽하게 수행하여 백성들로 부터 칭송이 자자하였다.
외직(外職)과 경관직(京官職)을 두루 거치는 동안 선생의 청렴 공평 그리고 강직함이 조정에 까지 알려져 마침내 첨지중추(僉知中樞)와 오위장(五衛將)을 겸하고 이어 가선대부 형조참판에 임명되셨다.

1515년에 운명하시니 춘추 76세이셨는데 잘 아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선생의 큰 금도와 인품으로 평가하여 더욱 현달 할 수 있었던 어른이었다고 아까워 하셨다.정부인(貞夫人) 강릉 김씨와의 사이에 계조(繼祖), 계증(繼曾),계선(繼先)계운(繼雲)위 4형제와 두 분의 따님을 두셨는대 장자인 휘 계조는 무과에 올라 통훈대부(通訓大夫)홍양현감을 지내고 둘째 휘 계증은 문과에 올라 승문원(承文院) 참교(參校)를 지내고 셋째 휘 계선은 문과에 올라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을 역임하시고 넷째 아드님 계운은 성균관 생원을 지내시는 등 네 분 형제가 문무과(文武科)에 올라 벼슬이 모두 현달 하였으며 특히 선생의 장손이신 억수(億水)는 문과에 올라 진주 목사, 성주목사의 외직을 거쳐 좌부승지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역임한 당상관 벼슬의 통정대부이시다.

그러나 후사가 없어 그의 4촌인 구수(求水)의 아들 응림(應臨)을 系子로 맞았는데 이 어른은 1559년 약관 23세의 나이로 경회정시 을과에서 장원급제(壯元及第)에 올라 홍문관 교리와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로 봉정대부(奉政大夫) 정4품의 벼슬에 올랐으나 아깝게도 32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이 분이 남긴 문장과 문집이 실록에 많이 남아있는 큰 문장가 였다고 사실(史實)은 전하고 있으나 정작 간직해야 할 직계문중에는 한 권의 문집도 보존하지 못하고 있다.이 어른이 남긴 일화 중 한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응림 열살때 한어린이 아이의 총명함을 보고 죽순(竹筍)이란 제목으로 시를 지어 보라고 하니 즉석해서 붓을 들고 시작(詩作)을 하는데「나 어찌하여 너를 꺽어 긴 피리를 만들어 태평곡을 지어 부를고?」하고 작시(作詩)를 하였다고 전한다.와 같이 참판공 하맹윤 선생의 후계가 한 때 빛나는 가통이었으나 그로부터 먼 훗날인 오늘 그 후손은 선대의 빛나는 업적과 영화를 올바로 계승치 못함을 못내 아쉬워 할따름이다.
오늘 그 장자인 계조의 직계는 전북 진안에 세거(世居)하고 둘째 계증의 후예는 주로 용인 도촌에 세거하면 넷째 계운은 진주 답천에 집성촌이 있다.대부분이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의 품계와 실직을 맡으셨던 이 집안의 선조들이 대동보의 선대유록편(先代遺錄篇)이 등재됨이 없음은 참으로 유감 된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