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헌부 감찰공 휘(諱) 형산(荊山)선조님의 묘소: 경남 함안군 법수면 우거리 어류동


 
하형산(荊山) 14세손
 

譯文
조선 세종 때에 치교(治敎)의 아름답고 밝음이 후세가 따르지 못함이었으나. 우리 성종도 다스림이 있는 임금으로서 영단을 내려 거느리고 백관이 보좌하여 일대의 치세를 이룩하였는데, 그 때 하공 같은 분이 계시어 높은 재주를 타고 나서 좋은 세상을 만나 대간(大諫)직책에 있으면서 임금의 깊은 은혜를 입어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음이 없이 간쟁(諫諍)하는 것을 당신의 임무로 삼아 대우받으심이 한(漢)나라의 급암(及암)같고 당(唐)나라의 위징(魏徵)같았으니 지금까지 공의 세대가 이미 사백년이나 흘렀는데도 당시의 풍절을 미루어 상상할 수 있다. 공의 휘는 형산(荊山)이요, 자는 진남(鎭南)이며 하씨인데 관향은 진주이고 고려 사직 휘 진(珍)이 시조요 원정공 휘 즙(楫)이 五代祖이시다, 고조의 휘는 윤원(允源)이니 수충좌리공신 중대광보국숭록대부 진산부원군이요 증조의 휘는 자종(自宗)이니 봉익대부 병조판서요, 조부의 휘는 왕(왕)이니 군사(郡事)요, 부친의 휘는 정발(程拔)이니 봉산(鳳山)군수다, 모친은 숙부인 함안 조씨(咸安趙氏)이니 현감 영(寧)의 따님인데 1439년에 공을 낳으셨다,

공은 일찍부터 학문에 힘써 크게 쓰일 희망이 있었고 1471년에 진사가 되었는데 문사(文辭)를 잘하는 자를 뽑으라는 임금의 교지가 있었으므로 영성부원군 문정공 최항(崔恒)이 공을 발탁하여 아뢰니 전교하기를「하모의 학문이 정박(精博)하다」고 하셨다.1472년에 경상 도사(都事)가 되고 이듬해 청주 목사에 제수되었으며 1477년에 감찰이 되고 1482년에 성균관 직강(直講)으로 제수되고 1484년에 경주 교수(敎授)가 되었으며 1486년에 외직으로 고성(固城)의 원(員)이 되고 이듬해서 대사간을 배수하였으니 이것이 공의 벼슬길의 대개이다. 공께서 돌아가신 연대는 상고할 수 없고 묘는 함안 평광(平壙)의 선영 밑 신좌에 있다, 숙부인 경주박씨(慶州朴氏)는 생원 유(유)의 따님인데 묘는 동원에 있고 숙부인 진양 정씨(晉陽鄭氏)는 유문(惟文)의 따님인데 묘는 합봉이다. 아드님 한 분을 두었는 바 휘는 옥(沃)인데 진사 홍문관 교리요 손은 서린(瑞麟) 자공(自공) 서장(瑞獐)이요 손녀사위는  참판을 지낸 상주의 신재 주세붕(周世鵬)인데 그 배위가 묘가 공의 묘 아래에 있으므로 지금까지 세의(世誼)가 여전하다, 증손 현손 이하는 심히 번성하였다.

후손 창권(彰權)이 족보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비문을 부탁하며 말하기를「우리 선조의 청고한 명절(名節)이 모두 집안의 문헌에서 고증할 수 있는데 묘에 옛날 비석이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 되어 비석을 수호(守護)하지 못한 데 이르러 후손들의 한 되는 바이니, 한 말씀을 주어 옛 비를 회복하게 하여 주기를 감히 청하는 바이오」하므로 내가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어서 사양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삼가 이와 같이 쓰고 이어서 명(銘)한다.

임금이 밝으니 신하는 알맞게도 어질었네.

우리 선생도 바른 말로 상소했네.

마음은 군국(君國)에 있고 뜻은 부광(扶匡:바르게 보좌)함에 간절했네.

천추에 의론함에 이름은 더욱 빛나네.

이어 오는 무덤을 찾는 자 슬퍼졌네.

비석을 중신(重新)하니 산의 양지이네.

누가 사간공(司諫公)의 무덤을 존앙(尊仰)하지 않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