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공(參議公) 휘 금(襟)선조님의 묘소  전북 정읍시 신월동 곤좌


하금(河襟) 13세손 

 

선조의 휘는 금(襟)이요 참의공(參議公)이시다 대간공 결 의 장남이며 사직공 13세손 이시다 조선 태조6년 정축년(丁丑年)1397년에 태어났다 유화(有和)한 성품으로 학업(學業)이 뛰어나고 유수(有數)한 인품으로서 문음 (門蔭)으로 관직(官職)에 나아 가시어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발탁 되시었는데 2.3년 후에 늙으심을 이유로 그만 두시었다  세종께서 그 조용하신 성품을 가상히 여기시여  통정대부 검공조 참의(通政대夫 檢工曺參意)에 발탁 하셨다 아버님 대간공(大諫公)께서 벼슬을 그만두시고 정읍 진산촌(井邑 辰山村)에 거주 뒤로 조석(朝夕)으로 문안(聞安)을 들릴수가 없고 해서 정읍으로 옮겨 가셨다

공(公)은  성품이 평정하고 조촐하시어 외화(外華)를  싫어하시며 요행으로 얻는것을 뜬구름 같이 여기시고 자연(自然)을 좋아하시고 공명(功名)을 구하지 않으시고 가족을 가르치시고 의리를 밝히시어 대대로 내려온 충효의가업(家業) 과 시(詩)와 예(禮)로 내려오는 집안 명성이 선대의 빛남이 그치지 않았으니 후손들에게 모범이 될 것이다  공은 세속의 뜻을 두지 아니하시고 란정(蘭情)을 기르고자 하시어 별도의 정사(精舍)를 진산촌 동쪽에다 지으시고 계화요초(桂花妖草)를 좌우에 널리 심으시고 꽃피는 아침 달뜨는 저녁에 뜰가를 산책하시며 세상사는 잊어버리시고 사셨다 
공께서 중을  미워하여 평소에 말씀하시기를「구담(瞿曇: 석가를 전세 때의 성)의 무리가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가까움을 알지 못하고 머리를 깍고 산중에 거하며 세상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여 속이니, 그 해로움이 막심하다」하시고  이를 배척하여 마지 않으셨다. 하루는 풍수(風水)장이 중이 스스로 신승(神僧)이라 일컫고 와서 말하되 안산(案山)의 홀석(笏石)이 지리(地理)에 해로우니 쪼아 버려야 길하리라고 하기에 드디어 쪼아 깨어 버렸더니, 오히려 탈이 되어 자손이 흩어졌다는 일이 지리지(地理誌)에 실려있다,

진산(辰山)과 우산(牛山)사이에 있는 칠송정(七松亭)의 소나무는 곧 공의 아드님 七형제께서 심으신 것인데, 한가한 날엔 거기서 노니시며 노래하고 젓대 불며 즐기고 돌아갈 줄 모르셨다. 이 때가 부귀의 전성기여서 정자가 즐비하였고 고관의 수례가 문전에 이어진 가운데 벼슬길에 오른 분이 20여 명인데다가 경재선생(文孝公)의 어진 이름이 있었으니 누가 선세(先世)께서  쌓으신 덕이 이에 활짝 피어났다 아니 하리요? 무릇 그 곳 산수와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가 하씨 소유 아닌 것이 없었는데. 지금은 모두 남이 점유한 바 되었고 별장과 그 섬돌이 충무공(忠武公)사당 경내에 들어갔으니 이 어찌 우리 후손들이 이마에 식은 땀을 흘릴 일이 아니겠는가?

묘는 정읍 아요치(阿要峙)간좌(艮坐)에 있는데 표석이 세워져 있다. 아드님 일곱분을 두셨는데, 대(帶)는 내금(內禁)이요, 그 분의 아드님 흥서(興瑞)는 횡성(橫城)현감이다. 여(礪)는 중추(中樞)요, 그 아드님 자청(自淸)은 함길(咸吉)감사다. 주(澍)는 제주 통판(通判)이요. 그 아드님 숭리(崇理)는 통덕랑(通德郞)이다,
치(治)는 군수이고, 그 아드님 중 자원(自原)은 통덕랑이다. 자담(自澹)은 진사인데 효성이 있어 상례에 과도히 슬퍼하셨다. 신(紳)은 문과에 올라 현령을 지내셨다. 그 아드님 중 자파(自坡)는 서윤(庶尹)이요, 자애(自애)는 진사요, 자감(自坎)은 현령이다. 순(淳)은 중추요, 그 아드님 경연(景沇)은 진사다, 준(濬)은 부사요. 그 아드님 응희(應羲)는 흥덕(興德)현감이다.
묘는 정읍 아요지 간좌에 있는데 표석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