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렴출척사겸 병마도절제사 휘(諱) 중룡(仲龍)선조님의 묘소: 전북 남원시 사매면 계수리 
 

하중용(河仲龍) 12세손
 

 

선생은 사직공(司直公) 12세손으로 군사공(郡事公)  계종선생의 세분 아드님 중 막내이다.선생의 휘는 중룡(仲龍)이요, 자는 숙현(淑見)이며 호는 남은(南隱)으로 1387년에 태어나 1456년에 돌아가시니 69세의 수를 누렸다. 3형제중 가장 두뇌가 명석하고 학문에 통달하여 1405년에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대대로 사시던 진주로 부터 서울로 이거(移居)하시어 춘추관(春秋館)의 수찬관(脩撰官) 사헌부 집의(執義) 승정원 의 좌우승지(左右承旨)집현전 직제학(直提學) 그리고 수문전(修文殿) 제학(提學)과 직보문각 등의 벼슬을 두루 역임하시고 또 외직으로 두 고을의 원님을 지내시는 등 명성과 공적을 남기시었다.

1418년 종2품(從二品)인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전라도 안렴사 겸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 권농관학사(勸農官學事) 제조형옥공사(提調刑獄公事)로 임명되어 순도(巡到)하시면서 민생을 구석구석 잘 살펴서 백성(百姓)들의 고충을 덜어줌으로써 목민관(牧民官)의 소임을 착실히 실천하여 칭송이 자자 하였다고 한다.안렴사의 임기가 끝나고는 조종해서 다시 공직을 맡을것을 권유했으나,벼슬길에 더이상 뜻을 두지않고 재직중에 모아두었던 전라도 북쪽 둔계 지방의 승경(勝景) 을 좋아하여 이곳 상동(上洞)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하여 살게 되었는데, 서울에서 남쪽으로 옮겨 은둔하였다는 뜻으로 남은처사(南隱處士)라 하고 성리학(性理學)의 학문에 정성을 쏟으면서 그곳 사대부(士大夫)들과 교유하였다.

사후에 강평공,이명신(康平公,李明晨)이 선생의 정직,엄숙 총명하심을 보고 시(詩)를 써서 찬양하기를 '엄정한 인품이여!청명 공평 관흥이라. 영기(英氣)를 간직하여 덕을 쌓으니 가을달 봄바람이 당신의 풍도(風度)로다. 산과 물을 좋아하여 호연지기(浩然之氣) 넘치니 꽃다운 이름 길이 빛나고 끼치는 경사또한 그지없으리'라 칭송하였다. 마나님 정부인(貞夫人) 진주강씨 사이에 외아들 휘 개달(開達)은 벼슬이 진용부위좌군사정(進勇副尉左軍司正)이었고 장손(長孫) 휘 설(渫)은 일찍돌아가시고 둘째 손자 휘 여덕(如德)은 벼슬이 조산대부행강진현감(朝散大夫行康津縣監) 이었다.

선생이 돌아가신뒤 지관이 유택지(幽宅地)를 정하기 위하여 산세와 지리를 보고 묘를 쓸 예정지를 정하고 왔는데 손녀가 최씨 가문으로 출가하여 남편이 일찍 죽어 과부로 있었는데 친정 조부의 묘자리가 명당 인줄알고 묘자리에 밤새 물을 퍼다 부어 놓았다.장사날에 묘를 쓰려고 땅을 파니 뜻밖에 물이 나는지라 할수 없이 그 자리에 쓰지 못하고 위쪽으로 올려서 썼는데, 그 자리에 손녀가 자기 남편 묘 를 이장 하였다고 한다. 이 후 최씨 집안을 날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고, 하씨 집안은 서서히 가세가 쇠약해 졌다고 전하는 전설이 있다,

현제 사매면 계수리에는 하씨는 한집도 살지않고 거의가 최씨 문중이며 선생의 묘 옆까지 최씨 가문의 묘가 수십 봉에 달하고 있다. 선생의 3형제중 장형 휘 숙(潚)과 둘째형 휘 척(滌)은 두분 모두 벼슬을 마치고 경남진주와 창녕(昌寧) 땅에 정착하였으므로 그곳에 후손이 많이 살고 있으나 선생은 지금의 남원(南原) 땅에 정착하였으므로 그 후손들이 전라북도 일원에 흩어져 살고있다.

묘소:  전북 남원시 사매면 계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