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감공 휘 척(滌) 선조님 묘소  묘소: 경남 창녕군 이방면 석리 마수 (마연산)
 

창녕현감공(昌寧縣監公)하척(河滌)12세손
 

 

자(字)는 양언(亮彦). 조선(朝鮮)시대 때 창녕현감(縣監)을 역임 하시다가 창녕군 이방면 옥야 내동(內洞)땅에 자리 잡은 입시조(入始祖)이시다  공의 아버님의 휘는 계종(啓宗)인데, 공양왕조(恭讓王朝)에 형조정랑(形曹正郞)이 되어 포은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상소하여 신돈(辛旽)의 다섯가지 죄(五罪)를 의정(議定)하시고, 후에 문경군사(聞慶郡事)가 되었는데,고려가 망함에 벼슬하지 아니하니 이 사실이 고려사(高麗史)에 실리었다.
1384년에 현감공께서 진주 이구산(尼丘山)밑 여사촌(餘沙村)에서 출생하였는데, 골상(骨狀)이 보통 아이와 달랐다.
처음 포대기에서 벗어날 때 이미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예절을 알았으며 열살에 친명(親命)으로 목은 선생(李穡)에게서 배우셨는데, 이 선생이 공의 부지런하고 총명함을 사랑하여 따님을 공에게 시집보냈다.

1425년에 총형인 문효공께서 경상감사(慶尙監司)가 되어 도내 여러 고을을 순찰하실 때 공께서 수행하였다. 예안의 추흥정(秋興亭)과 함안의 청범루(淸範樓)와 진주의 촉석루(矗石樓)와 거제의 무이루(撫夷樓)와 밀양의 영남루(嶺南樓)가 다 공의 수레가 이른 곳인 바,  도처에서 시를 읊으시고 귀환하셨다.
1451년에 문효공과 더불어 족보 상하집을 엮으시고 응석사(凝石寺)의 영당을 수리하고 내외 친척들과 자금을 모아 길이 제사할 보장고(寶藏庫)를 만들고 서로 운자(韻字)를 나누어 그 사실을 적으셨다. 진양(晉陽)에 종토(宗土)를 두게 된 것은 실로 이를 본 받은 것이다. 가문의 음덕으로 여러 번 군수가 되어 백성보살핌에 전념하시니. 이른 곳마다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1453년에  창녕현감(昌寧縣監)을 역임하고 있었는데 이 무렵에 조정이 시끄러워 대신(大臣)들이 죽임을 당함을 보고 다시 벼슬할뜻이 없어. 즉시 벼슬을 버리고  고을 서쪽 옥야방(沃野坊) 내동(內洞)으로 이사하여 꽃과 나무를 심고 거문고를 타고 시를 지으심으로 낙을 삼으시니. 창녕(昌寧)의 하씨(河氏)가 공으로 부터 비롯되었다.
1458年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75세였다. 묘소는 고을 서족 마연산(馬淵山)을좌(乙坐)이다. 임진왜란 때 석물(石物)이 다 부서져 새긴 문자가 유실되었다. 마나님은 한산 이씨(韓山李氏) 목은(牧隱) 선생의 따님 인데 여덕(女德)이 있었다.
묘는 합봉이다. 외아들 맹질께선 청백리(淸白吏)였고 손자 주(澍)께선 세자우시직(世子右侍直)이었다. 어느날 공의 17世孫 대룡(大龍) 선비가 집안 아저씨 일병(一秉)의 명으로 유사(遺事)를 안고 百리 밖에서 건너와 나에게 비명(碑銘)을 청하기에 내 사양하지 못하여 삼가 이와 같이 서 하고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일찍 목은에게서 수학하시고 말년에 화입음을 벗으시어 일거에 벼슬을 버리셨네
감출 줄 알고 드러낼줄 아셨으니 군자의 도리로다.
아름답다 고풍이여 행지가 합당하네.
저 마연산을 보건데 군자 묻힌곳이라 이에 돌에 새기니 잊을 수 있겠는가?"

배위는 한산 이씨 이시며 고려말의 성리학자 이며 삼은 (三隱)의 한 사람인 목은(牧隱) 이색 선생의 따님 이시다.

묘소: 경남 창녕군 이방면 석리 (마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