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효공 휘 연 (演)선조님 묘소  :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소래산

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 經筵 春秋館 書雲觀事 世子師

문효공 경재 하 연(河演) 12세손

경재(敬齋)선생은 1376년 (고려 우왕 2년) 8월 13일 이구산(尼丘山) 아래 餘沙村(,현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에서 아버지 木翁公 하자종(河自宗)선생과 어머니 진양정씨의 사이에 9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공의 휘는 연(演)이요, 자는 연량(淵亮),또는 신희옹(新稀翁)이며 호는 경재(敬齋)이며 본관은 진양(晉陽) 이다.

증조는 중대광보국숭록대부 진천부원군(晉川府院君) 송헌(松軒) 하집(河楫)이요 시호는 원정공(元正公)이시다. 조부는 중대광부국숭록대부 진산부원군(晉川府院君) 고헌(苦軒)하윤원(河允源)선생이며.부친 목옹공 하자종선생은 고려에 벼슬하여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고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이성계의 끈질긴 회유를 뿌리치고 두문동 칠십이현(七十二賢)에 동참하였으나 뒤에 아들의 귀현으로 좌의정(左議政)에 추증(追贈)되셨다. 경재 선생은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천자와 기운이 수려하고 당당하였으며 배우기를 좋아하셨다.

6세 이후로는  부친 목옹공이 주로 외직으로 있었으므로 그의 임지(任地)를 따라 각 지방으로 옮겨다니며 생활하셨다.13세가 되던 1388년 때에 부친을 따라 야은(冶隱) 길재를 대면하고 불사이군의 의리에 대하여 이때까지 경재가 배운바를 설명하자 야은(冶隱) 은 이 아이가 우리들 기성세대가 지켜야 할 지도자의 덕목(德目)을 올바로 지적했다고 대견하게 여긴바 있다. 14세 때 부터 포은(圃隱) 정몽주의 문화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경재는 본래 학문의 좋아하는 데다가 포은 같은 훌륭한 스승을 만났으니 더욱 학문에 힘을 쏟아 성리학(性理學)에 사구(思究)가 깊었다.스승의 가르침이 남달라 경재는 포은을 친부모와 같이 따랐으며 정동골 육친(精同骨肉親)이라 표현할 정도로 친분이 있었으나 4년 뒤에 포은이 이방원의 의해 비명횡사 하니 경재의 슬픔은 크고 애통한 것이었다.

소산서원:시흥시 신천동 소래산

문효사:문효공 위패을 모신 사당

경재는 19세 되던 해인 1394년에 성주이씨(星州李氏) 존성(存性)의 넷째 따님과 결혼하니 원정공(元正公)의 외손자 통정(通亭) 강회백(姜淮伯)과 동서간이 되었다. 21세 되던 해의 봄에 생원(生員)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여름에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그 다음해에 봉상시(奉常寺)의 봉사(奉事)로 공직에 첫 출발하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예문관(禮文館), 사헌부(司憲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승정원(承政院) 및 육조(六曺) 의 요직과 두차례의 고을원과 네 차례의 관찰사(觀察使)를역임한 바 있었다.

1419년에는 조선건국 이후 처음으로 경연(經筵)을 열었는데 경재 선생이 44세의 나이로 이 경연의 참찬관(參贊官)으로 발탁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는 경재의 학문과 경륜을 높이 산 증거라 할 것이다.경재 선생은 나이 45세 때인 1420년에 예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중국 가는 사신(使臣)으로 선발되었는데, 당시 대국의 사신으로 뽑히려면 학문과 시문에 밝고 식견, 언변, 기지,담력 등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자질 이 있는 인물을 선발하였으니 선생의 뛰어난 자질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할것이다.

1423년 경재 48세 때에 는 세종 임금에게 척불소(斥佛疎)를 올려 조선의 개국 이념인 숭유 배불 정책을 강화해 나가도록 권하여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 데 힘썼다.1425년 50세 때에 경상도 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재직할 때 세종 임금의 명을 받들어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를 편찬한 바 있는데 현재에 이르러 다른 도의 지리지는 다  없어졌으나 오직 경상도 지리지만 보존되고 있다,
이것은 현존의 최고(最古)의 조선시대의 지리지(地理誌)이다.1430년 형조판서(刑曺判書)로 재직하실 때에 왕명(王命)에 의하여 정승 허조(許稠)와 함께 유교국가의 예제(禮制)의 기본골격인 국조오례 의(國朝五禮儀)를 편찬한 바 있다.

선생은 56세 때인 세종13년 1431년 2월 1일에 예문관(禮文館) 대제학(大提學)에 제수(除授) 되는 영광을 얻었다.대제학을 문형(文衡)이라고도 하는데 한 집안에서 문형에 올랐다 하면 정승 판서 보다도 더 귀하게 여겼던 것이 조선시 대의 관례였다. 대제학은 누구를 막론하고 학문과 문장이 심오 하고 전아함을 인정 받았음은 물론이다.

1437년 62세 때에 이조판서(吏曺判書)로 재직하면서 조선의 세제(稅制)를 만들어 우선 영남과 호남에 실시하여 납세를 현실에 맞게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게 하는 데 주력 하였다.1445년 연세 70세에 우의정이 되시니 비로소 상신(相臣)의 반열에 올랐다. 72세 때에는 좌의정(左議政)으로 영전되고 1449년 74세 때에 영의정(領義政)에 올랐다.

그 뒤 조선 5대 임금 문종이 즉위하여 이미 낡은 대자암(大慈庵)을 중수하려 하자 선생은 이단(異端)을 숭상해서는 안된다고 굳게 간언(諫言)하니 문종은 과거 세자때의 스승인 노신(老臣)의 진언을 가납하여 대자암 중수를 중지한 일화는 유명하다.경재 하연(敬齋 河演) 선생은 말단 공직으로 부터 출사(出仕)하여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인 영의정(領義政)의 자리에 까지  오르면서 근검(勤儉) 청백(淸白)의 정신으로 정진하여 나라 발전에 큰 족적 을 남기고 문종원년 1451년 76세의 연세로 퇴임하게 된다. 퇴임하시던 그 해에 우리 하씨(河氏)의 족보인 경태(신미)보 를 간행하시니 우리 나라 족보 문화의 효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나 아깝게도 후손이 불민하여 그 원본을 보존 전수치 못하고 서문만이 진양지(晋陽誌)에 소개되고 있을 따름이다.오하(吾河)의 경태보(景泰譜)보다 25년이나 늦게 간행된 안동권문(安東權門)의 성화보(成化譜)가 우리 나라 족보의 효시라 하여 규장각 도서관에 소장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경재 선생은 1453년 8월 15일 향년 78세를 일기로 많은 업적을 남기고 별세하시니 단종임금 은 슬픔을 감추지 못하면서 3일 동안 조회를 중지 하였다고 한다. 1454년 단종 2년에 문효(文孝)라는 시호가 내리고  문종의 묘정에 배향 되셨다. 좌의정 남지(南智)선생이 유채비문을 짓고 1463년 세조 9년에 강희맹이 행장(行狀)을 지었다.

경재(敬齎) 하연(河演) 선생은 태평성대인 태조 시대인 21세 때에 관직에 입문하여 76세에 영의정(領義政)의 벼슬을 물러날 때까지 무려 53년 동안 나라경영에 혼신의 심혈을 기울여 봉사하였으며,선생은 조선 개국 이후 500여년 동안 청백리157분 중에 한분이시며 조선의 초창기 국법 질서와 기강을 바로 세우는 데 지대한 공로를 남김으로써, 평화시대의 공복으로써 위대한 사표(師表)를 남기셨다.


 문효공 영정을 모신 청원 우록서원 문효영당


 문효공 영정을 모신 무주 백산서원내 타진사